12가지 살인수칙… “유영철이 롤 모델, 7명 죽인다”
입력 2014-04-11 03:23
이런 ‘괴물’이… 왜, 어떻게 만들어졌나
공익근무요원 이모(20)씨는 지난달 22일 밤 11시쯤 서울 반포동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다세대주택이 밀집한 동네였다. 주머니에는 칼 두 자루와 가스총이 들어 있었다. 손에 든 쇼핑백엔 벽돌을 하나 주워 넣었다. 칼과 총과 벽돌을 들고 그가 기다린 건 ‘여자’다. 누가 됐든 길 가는 여성의 돈을 빼앗고 죽이려 이 골목에 온 거였다.
잠시 후 20대 여성이 골목에 들어서자 이씨는 1.6ℓ 맥주병을 내려놓고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여성은 금세 집으로 들어가 버렸고 그는 골목 어귀로 돌아가 다시 맥주를 마시며 다음 여성을 기다렸다. A씨(25·여)가 나타난 건 10분쯤 지나서다. 100m가량 뒤따라간 그는 빌라로 들어가려는 A씨에게 칼을 들이댔다. A씨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려 하자 칼로 7차례나 찔렀고, 칼날이 부러지자 벽돌을 꺼내 20차례나 내리쳤다. A씨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이것은 돈을 노린 강도의 우발적 살인이 아니다. 이렇게 잔혹한 수법은 사무친 원한에 살인을 저지를 때나 등장한다. A씨 비명을 듣거나 현장을 목격한 주민들의 112신고가 10건 이상 접수되고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와 지켜보는데도 그는 살인에 ‘열중해’ 있었다. 범행을 제지하려던 주민들에게 칼을 휘두르며 위협했고, 경찰이 출동하자 칼을 자기 목에 댄 채 저항하다 2시간여 만에 검거됐다.
경기도 김포의 한 주민자치센터에서 근무하던 그는 이틀 전 근무지를 무단이탈했다. 외박을 하고 다음 날 집에 들어갔다가 어머니한테 심한 꾸중을 듣자 화장대와 컴퓨터를 부순 뒤 다시 집을 나와 이 살인을 저질렀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A씨를 벽돌로 내리칠 때 ‘왜 이리 안 죽지?’란 생각을 했다”고 진술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무작위로 골라 잔혹하게 살해한 이 ‘묻지마 살인범’은 1년여 전부터 살인을 준비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일기장에는 ‘롤 모델은 유영철(21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다’ ‘7명을 죽인다’ 같은 12가지 ‘살인수칙’이 정리돼 있었다. 그의 집에선 인터넷으로 구입했다는 손도끼 쇠파이프 등 살인도구가 쏟아져 나왔다.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부장검사 조기룡)는 10일 이씨를 강도살인, 살인예비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그는 검사에게 “나를 사형시켜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곽대경 교수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불만, 자신의 상황에 대한 한탄이 쌓여 저지른 범행인 듯하다”며 “한마디로 괴물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왜 이런 ‘괴물’이 됐을까.
살인마 유영철을 본보기로
이씨는 A씨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살인 욕구와 불만을 해소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서울 강남을 범행 장소로 삼은 것도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가다가 멈춰선 곳이어서”라고 진술했다. 그는 김포에서 무작정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서울 서남부의 PC방 찜질방 등을 돌아다니다 반포동에 갔다.
지난달 24일 이씨의 김포 집을 압수수색할 당시 회칼, 손도끼, 쇠파이프, 모형 일본도 등이 대량 발견됐다. 지난해 1월부터 인터넷으로 구입해 방에 감춰뒀던 것이라 부모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씨가 노트에 썼던 일기도 나왔다. 일기장엔 스스로 행동수칙이라 칭한 글들이 적혀 있었다.
‘나는 내 가족,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증오한다’ ‘나는 언제라도 살인을 할 수 있게 몸을 단련한다’ ‘죽이지 못할 놈들은 건드리지 않는다’ ‘살해 순위는 애새끼들, 계집년, 노인,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 순이다’ ‘내 롤 모델은 유영철 형님이다’ ‘7명을 죽인다’ 등이었다. 그는 ‘신이 나를 버렸으며 나도 신을 버린다’는 글도 적었다.
그는 사람을 살해하고 증거를 인멸하는 방법, 몸을 단련하는 방법 등도 기록해 놓았다. 모두 인터넷을 뒤져 수집한 자료라고 한다.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에 대한 동경도 여러 곳에서 발견됐다. ‘유영철의 대담함을 본받고 싶다. 정신 강화가 필요하다’ 등이다. 2월 20일자에는 ‘울산 살인범 김홍일은 나와 닮은 점이 있는 것 같다. 그는 불쌍한 사람이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김홍일은 지난해 7월 여자친구와 그 여동생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무기징역이 확정된 인물이다. 이런 정황 때문에 검·경은 당초 연쇄살인 등 추가 범행을 의심했다.
그의 컴퓨터에서는 경찰청, 교정본부, 육군교도소 등의 명의로 된 위조 신분증도 다수 발견됐으나 실제 사용한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우울증→왕따→자퇴→자살 시도→군대 부적응
이씨는 어린 시절부터 충동조절장애, 대인기피증, 우울증 등을 앓았다. 그는 검찰에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많이 당하고 무시를 받았다. 가족 외에는 외톨이였다. 사회에 불만을 많이 갖게 됐다”고 진술했다. 중학교 2학년 때인 2006년 어머니에게 꾸중을 듣고 집을 나온 뒤 동네 슈퍼마켓 주인아주머니를 벽돌로 내리친 적도 있다. 형사 미성년자(만 14세 미만)라 기소되지는 않았다.
결국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거의 매일 방안에 틀어박혀 있거나 PC방을 오가며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10월 동네 PC방에서 시비가 붙은 친구가 “잘 나가는 형들에게 말해서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하자 집에 있던 망치를 가져와 마구 구타하기도 했다.
이씨는 2012년 12월 현역병으로 군에 입대했지만 훈련소에서 자살을 기도했고 정신감정 등을 거쳐 ‘현역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이어 김포시청에서 공익근무를 시작했으나 지난해 7월 다시 자택 인근의 주민센터로 근무지를 옮겼다.
우울증, 왕따, 고교 자퇴, 자살 시도에 이어 군대 부적격 판정까지 이씨는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모두 겪었다. 이는 어쩌면 그가 자신의 문제를 외부에 알린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는 “군 복무 초기에 자살 시도 같은 문제가 있었는데 그 심각성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며 “문제 사병을 치워버리겠다는 안이한 인식이 이씨를 공익요원으로 돌려버렸고 결국 시한폭탄 같은 이가 우리 사회로 내던져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씨는 공익근무를 하면서도 정기적으로 정신병 치료약을 먹었다. 거의 매일 지각해 결국 지난해 말 복무 연장 징계를 받았다. 올 12월 31일 끝날 공익요원 복무기간이 내년 1월 5일까지 닷새 연장됐다. 주민센터 관계자는 “이씨가 복무 연장에 많이 속상해하고 자존심 상해했다”면서도 “지각하지 말라고 하면 고분고분 수긍했고 평소 위협적인 행동을 하진 않았다”고 전했다. 다른 직원은 “말도 잘하고 인사도 잘했는데 컴퓨터로 웹툰을 많이 보는 것 같았고 휴대전화는 거의 만지지 않았다. 연락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듯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이씨는 일기장에 자신을 관리하던 여성 공무원을 살해 대상으로 적시해 놓았다. 검찰은 이 부분에 대해 살인예비 혐의를 적용했다.
이씨는 범행 후 경찰서에서 조사 받는 내내 손을 파르르 떨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경찰이 부르면 화들짝 놀라거나 심하다 싶을 만큼 주변 눈치를 살폈다고 한다. 구치소로 옮겨진 뒤에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싫다”며 독방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의 2월 2일자 일기에는 “가족 외에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혼잣말 하는 게 재밌다”고 적혀 있다.
‘묻지마 범죄’의 전형
전문가들은 이씨를 사이코패스 성향을 지닌 잠재적 연쇄살인마의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반사회적 성향과 신세 한탄에서 비롯된 범행 동기, 잔인한 수법, 연쇄살인마에 대한 동경 등은 일반 범죄자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란 것이다.
곽대경 교수는 “첫 범행이어서 수법은 서투르지만 사회에 대한 분노가 상당히 높았던 상태”라며 “사회에 반감이 있더라도 가족 등을 통해 완충 작용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불만이 더 증폭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건국대 경찰학과 이웅혁 교수는 “사회적 약자인 노인이나 여성, 아이를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유영철과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이씨가 일기에서 ‘나를 화나게 하는 것들’ 등의 표현을 쓴 점은 본인의 잘못을 제3자에게 돌리는 행위인데 이 역시 이혼당하고 여성에게 반감을 품은 유영철과 유사하다. 이씨는 잠재돼 있던 또 하나의 연쇄살인범”이라고 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특별한 동기가 없는 묻지마 살인은 2006년 354건에서 2010년 465건으로 급증했다. 단순히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살인을 저지른 경우도 같은 기간 32건에서 70건으로 늘었다.
형사정책연구원은 최근 ‘묻지마 범죄자 특성 이해 및 대응 방안 연구’ 논문을 발표하며 “묻지마 범죄자는 취업, 학력, 가정상황, 친구관계 등에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회적 약자 입장에 있는 경우가 많다. 직장 상담센터나 지역사회가 은둔형 외톨이나 극단적 불만을 지닌 사람들을 찾아내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호일 박요진 박세환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