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길에 다다른 현대인 이야기… 세기적 은둔 작가 美 토마스 핀천 소설집 ‘느리게 배우는 사람’
입력 2014-04-11 03:29
세기적 은둔 작가인 미국 소설가 토마스 핀천(77)이 1984년 출간한 유일한 단편집 ‘느리게 배우는 사람’(창비)이 국내 초역됐다. 필립 로스, 코맥 매카시, 돈 드릴로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네 명의 소설가로 꼽히는 핀천은 코넬대 공학물리학과에 입학한 후 2학년 때 문리학부로 전과해 영문학을 전공했고 1959년 전 과목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문학적 천재였다. 그는 1960년 보잉사에 취직해 로켓 개발을 비롯한 항공과학 분야에서 일했으나 2년 만에 그만두고 일정한 거처 없이 캘리포니아와 멕시코 등지를 떠돌다가 63년 첫 장편 ‘브이’를 발표하며 최우수 데뷔소설에 주는 윌리엄 포크너 상을 수상했다.
단편집 ‘느리게 배우는 사람’은 그가 64년 발표한 ‘은밀한 통합’을 비롯, 대학생 시절에 쓴 초기작 다섯 편 등 모두 6편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단편집에서 정작 눈길을 끄는 것은 수록작 자체보다 그가 이미 문학적 거장의 반열에 접어든 시점에 이 단편집을 위해 쓴 원고지 100여 장 분량의 ‘작가 서문’이다.
“설사 말소된 수표라 하더라도, 이십 년 전에 쓴 작품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게 자신에게 얼마나 큰 충격일지 여러분은 아마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편들을 다시 읽었을 때 나의 첫 반응은 한마디로 ‘오 맙소사’였다. 돌이키고 싶지 않은 신체증상이 동반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고 나서 들었던 두 번째 생각은 완전히 다시 쓰자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충동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나는 중년다운 평정심을 내세워, 그 당시 어린 작가였던 나를 이제 있는 그대로 봐줄 나이가 된 것처럼 행세하기로 했다. 이 어린 친구를 내 인생에서 내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작가 서문’에서)
‘작가 서문’에서 그는 수록작 한편 한편의 공과를 세세하게 짚어가며 젊은 시절의 자화상을 직접 그려가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고 가치가 있다. 핀천이 작가의 꿈을 키워나가던 1950년대 미국은 체제와 권위에 대한 순응을 강요하는 기성세대에 맞서 젊은 세대들이 이른바 비트 운동을 전개하며 갈등이 심화되던 때였다. 스스로를 ‘포스트 비트세대’로 칭한 그는 비트문화의 영향을 받고 자란 세대로서 저항정신과 자유추구는 계승하되, 동시에 비트세대가 지닌 한계, 즉 젊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자 했다.
수록작 가운데서도 핀천 자신이 “습작생을 뛰어넘어 신인작가의 작품에 가까운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한 단편 ‘은밀한 통합’은 기존의 관습과 규범을 따를 것을 강조하는 어른들과 그것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십대들의 반항을 그리고 있다. 어른들과 아이들의 대립구도는 신흥 주택가에 흑인 가족이 이사 오면서 더욱 분명해진다. 알코올중독자인 흑인 음악가 칼 매카피를 만난 직후 소년들은 칼 배링턴이라는 흑인 소년을 상상으로 만들어내고 어른들과는 달리 그 흑인 소년과 같이 어울리며 인간적으로 통합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칼이 유색일 뿐 아니라 모든 색깔과 좀더 깊이 엮여 있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칼에 대해 생각할 때면 팀은 늘 그를 지난달 초가을의 시뻘건색과 황토색을 배경으로 해서만 바라보았다. (중략) 칼은 일종의 조명, 빛남, 그것이 무엇이든 잃어버린 빛을 보상해주는 역할을 했다.”(‘은밀한 통합’에서)
인종문제를 배후에 깔고 있는 이 작품에서 핀천은 흑인을 대하는 백인 어른들의 시각이 비인간적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의 시각에서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 역자인 박인찬 숙명여대 영문과 교수는 “핀천은 자신의 초기 단편들이 결함투성이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 점을 감안하고 읽더라도 이 소설집은 황무지 위의 삶에서 막다른 길에 다다른 현대인의 이야기를 동시대의 새로운 감성으로 그려낸 수작”이라고 말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