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0) 제중원에 무슨 일이 있었나

입력 2014-04-11 03:39


여성 위해 ‘기녀’ 데려다 간호사로

처음 선교사들은 다 제중원에서 일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85년 4월부터다. 그들이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바로 제중원이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알렌은 교파의 차이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선교사들을 모두 제중원에서 일하게 했다. 제중원이 세워진 후 의료교육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입국한 모든 선교사들이 다 가르치는 일에 동원됐다. 모든 것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알렌은 선교사들을 병원에서 일하게 하면서도 꼭 조정에 미리 알려 허가를 얻는 법적 절차를 밟았다. 초기 선교사로서 알렌이 얼마나 조심성이 있고 또 준법정신이 투철했는지 머리가 숙여질 정도다. 알렌 덕에 선교사들이 비로소 한국사회에서 존경을 받으면서 일할 수 있었다. 선교에도 거쳐야 할 이 세상의 법도와 규범이 있다는 그런 자세가 바탕이 됐기에 기독교가 한국에서 그렇게 눈부신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알렌, 한국 전래의 치병방법과 한방 인정

알렌의 일생을 살펴보면 초기선교사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명확히 드러난다. 갑신정변 직후 수십 명의 한의사가 먼저 달려가 민영익을 치료하고 있을 때, 알렌은 정말 그들의 치료가 효험이 있기를 바랐다. 그 방법으로도 병이 나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약이나 뜸, 침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후원을 다했다. 효험이 크다고도 말한 일이 있다. 심지어 알렌은 무당의 굿을 보면서도 그것을 미신이라고 무조건 타박하는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가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라 해도 처음부터 무조건 비판하지 않았다. 일단은 존중했다. 알렌의 강직한 인품과 성격을 알 수 있다.

알렌이 의료수가를 받은 이유

제중원과 관련해 한 가지 꼭 말해야 할 것은 알렌은 환자들에게 대개 정확한 유료진료를 원칙으로 했다는 것이다. 조정에서 약품이나 시설비로 당시 매년 약 3200달러의 경비를 받았다. 지원을 받았음에도 요금을 받은 것은 수익 목적이 절대 아니고, 다만 밀려드는 환자 수를 제한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더구나 한국인들은 구경하기를 좋아해서 거짓으로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찾아드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어 정작 위급한 환자들을 돌보기 어려워서 그랬다는 것이다.

예산 때문에 알렌이 힘들어한 점도 있다. 병원시설의 관리·운영비와 인건비는 조정이 부담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파견된 관리들이 처음엔 8명이었으나 나중에는 그 수가 배 이상 불어 조정의 지원금을 금세 다 써버리게 됐다. 중요한 것은 그 늘어난 관리들은 당초 파견하기로 약속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 관료사회의 부패상을 여기서도 적나라하게 불 수 있다. 또 알렌이 놀란 것은 한국인들은 병원에 와서 진찰을 받고 수술을 하고, 치료비를 낼 때에 그 의료행위에 대한 수가가 아니라, 의사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의생들이 어떤 대접을 받았었는지 짐작이 간다.

여자 환자들과 기생 간호사

근대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남자 의사의 진찰이나 수술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원을 찾아왔더라도 멀찌감치 앉아 통역을 통해 소리소리 지르면서 진찰을 받았으니 환자와 의사, 피차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알렌의 일기에는 어떤 나이 든 여성이 남자에게 진료를 받을 수 없다며 우겨 결국 집에서 앓다가 그대로 숨진 이야기를 통분한 마음으로 써 놓았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조정에서는 할 수 없이 평안도와 황해도 감영에 통지해 제중원에서 일할 13세에서 16세 사이의 총명한 기녀를 선발해서 보내라고 공문을 보냈다. 결국 기녀 다섯 명이 차출돼 제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일한 기간은 보름밖에 안 된다. 여론이 나빠서 곧 해직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기녀들을 왜 하필 서북지방에서 차출했을까. 남남북녀란 말이 사실이던가. 기왕이면 예쁜 여자 간호사를 차출하기 위해서였을 테지만 나이도 13∼16세라면 너무 어리다. 조정의 고충도 심했을 것이다. 아무나 데려다가 쓸 수도 없고, 그래도 사회적으로 활동을 한 여성을 차출해야 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한국 최초의 공적 기관에서 일한 여성에 대한 기록에 등장하는 것이 기녀라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다. 앞으로 언급하겠지만 한국 최초의 대학 세브란스의 최초 한국인 교수도 백정 출신이었다. 누구든지 어떤 신분이든지 사회적 진출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우리 기독교다.

제중원 여자부의 설치

남자 의사를 불편해하는 것은 궁의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명성황후 역시 알렌 말고 여자 어의가 자신을 진찰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결국 북장로선교부는 애니 앨러스라는 유능한 여의사를 한국에 파견했다. 그는 1886년 7월 입국해 곧 제중원의 여의사로 활동을 시작하고 명성황후의 어의가 된다.

민경배 백석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