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21세기 솔제니친’이 목숨 걸고 밝힌 진실은…
입력 2014-04-11 02:11
러시안 다이어리/안나 폴릿콥스카야/도서출판 이후
전직 KGB 요원, 전투기 조종간을 잡고 유도복을 입은 대통령. 강력한 러시아를 상징하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 뒤에 숨겨진 푸틴 제국의 이면은 힘을 넘어 살벌하기 그지없다. 푸틴 집권 이후 러시아에서는 수많은 언론인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았는데 2006년 10월 모스크바 자택에서 암살범이 쏜 총알을 맞고 숨진 언론인 안타 폴릿콥스카야는 21세기 솔제니친으로 불릴 만큼 다큐멘터리 저널리즘의 양심으로 기억된다.
이 책은 푸틴의 재선을 위한 한낱 쇼로 전락한 2003년 12월 러시아 의회 선거에서부터 재선에 성공한 푸틴이 인권운동과 민주주의 세력을 철저히 무력화시키는 2005년 8월까지의 비망록을 담고 있다. 두브롭카 극장 인질극, 모스크바 지하철 테러 사건, 베슬란 초등학교 인질극 등 러시아에서 발생한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꿰뚫으면서 저항할 의지도, 수단도 빼앗긴 러시아 민주주의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안나가 자신의 피를 펜 끝에 묻혀 쓴 유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푸틴은 과거 비밀경찰로 근무했던 경력에 힘입어 언론이 체첸 내에서 일어나는 러시아군의 잔혹 행위를 보도해 곤혹스러워지는 일이 없게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안나는 목숨을 걸고 50여 차례나 체첸을 방문한다. 안나가 몸담았던 ‘노바야 가제타’는 보도를 줄이거나 논조를 순화하라는 크렘린의 압력에 굴하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신문 중 하나다. 2003년 푸틴의 재선에 대한 안나의 보도는 그 대담성과 폭로의 내용을 감안할 때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푸틴에 맞섰던 후보들 중 한 명인 이반 립킴의 실종은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마치 소설처럼 읽을 수 있을 정도다. 모스크바에서 실종된 립킨이 약물에 당했던 것이라면서 런던에서 불쑥 나타났기 때문이다.
안나는 이를 두고 “고국을 떠나 있는 대통령 후보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이라며 이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푸틴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안나 역시 2004년 9월 로스토프 행 비행기 안에서 독이 든 차를 마시고 사경을 헤맸다. 베슬란 초등학교 봉쇄작전이 펼쳐지던 현장으로 가던 중이었다. 그 뒤 그녀를 향한 러시아 당국의 압박은 더욱 심해졌고, 이런 상황이 그녀를 크렘린 정치의 희생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에 대해 보도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게 만들었던 것이다.
비망록은 푸틴의 제국인 러시아가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공산주의 이후의 과도기 상태에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조준래 옮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