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만년 세월 기록된 ‘지구의 지문’… 제주관광공사 개발 ‘산방산 지질트레일’ A코스
입력 2014-04-10 02:19
80만년 지구의 시간을 품은 ‘산방산·용머리해안 지질트레일’이 지난 5일 첫선을 보였다. 제주관광공사 등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선정된 제주도의 지질자원을 관광상품화하기 위해 개발했다. 지질트레일은 2011년 선보인 ‘수월봉 지질트레일’에 이어 두 번째이다. 지질트레일에는 지질이라는 지형적 자산뿐 아니라 역사, 문화, 음식 등 마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번에 개발된 ‘산방산·용머리해안 지질트레일’ A코스(14.5㎞)와 B코스(14.4㎞)를 두 차례에 걸쳐 각각 소개한다.
용머리해안 주차장을 출발한 ‘산방산·용머리해안 지질트레일’ A코스가 첫 번째로 만나는 비경은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의 설쿰바당이다. ‘설쿰’은 쌓인 눈 더미 속에 바람이 불면서 만들어진 구멍인 ‘설혈’에서 비롯된 말이고, ‘바당’은 바다를 뜻한다. 한라산 백록담보다 먼저 생겼다는 산방산과 용머리해안이 마치 바다로 돌아가는 거대한 거북이처럼 보이는 설쿰바당은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사계리 형제해안도로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토기를 원시적인 뗏목배인 ‘테우’로 실어 나르던 사계포구에서 송악산까지 이어지는 형제해안도로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힐 정도로 풍경이 수려하다. 사계포구 앞바다에 형제처럼 다정하게 서 있는 형제섬은 해돋이 명소다. 본래 하나의 섬이었는데 18세기 가운데 부분의 바위가 무너져 두 개의 섬으로 변했다고 한다.
형제해안도로 앞 바닷가에는 누런 빛깔의 알갱이가 오밀조밀하게 뭉쳐진 암석덩어리들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하모리층으로 불리는 이 암석은 생김새가 누룩을 닮아 누룩돌 혹은 누룩빌레로 불린다. 누룩돌은 송악산이 폭발하면서 만들어진 다량의 화산재가 해안에 쌓이면서 굳은 퇴적층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풍화작용으로 크고 작은 웅덩이들이 생겨났다.
갯벌이 없는 제주도에서는 이 웅덩이에 들어온 바닷물을 이용해 소금을 만들었다. 여름철 가뭄 때는 바닷물의 증발이 빨라 소금농도가 높은 짠물웅덩이가 된다고 한다. 사계리 주민들은 그 물을 따로 저장해 장을 담글 때 이용하거나, 솥에 넣고 끓여서 소금을 만들기도 했다.
바닷바람이 시원한 형제해안도로를 걷다보면 더 이상 해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울타리가 쳐진 곳이 있다. 2003년 발견된 사람발자국화석지대로 고고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송악산의 용암이 분출된 후 화산재가 쌓이고, 그 위를 사람들이 걸어 다닌 발자국이다. 이곳에는 사람발자국 외에도 사슴, 새 등 동식물 화석도 함께 발견됐다.
사람발자국화석에서 대정향교가 위치한 단산까지는 3.2㎞로 드넓은 들판을 가로지르게 된다. 검은 밭담 안에는 노란색 유채밭과 초록색 마늘밭이 바둑판처럼 펼쳐진다. 단산을 배경 삼은 대정향교는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 중 학생들을 가르쳤던 유서 깊은 곳. 기숙사인 동재에 걸렸던 현판 ‘의문당(疑問堂)’은 추사의 친필이다. 원래의 현판은 ‘제주추사관’에 전시되어 있다. 대정향교 옆에 위치한 세미물은 단산의 산기슭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우물로 추사는 이곳의 물을 길어 차를 끓였다고 전해온다.
지질트레일이 단산 등산로를 힘겹게 오른다. 제주도의 오름은 대부분 곡선을 그리고 있지만 단산은 거칠고 사나운 생김새를 하고 있다. 단산은 산방산과 함께 제주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화산체로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을 달리한다. 사계리 쪽에서 보면 박쥐가 날개를 펼친 모양이지만 인성리에서 보는 단산은 추사체로 쓴 ‘山’자를 닮았다.
학자들은 제주도 유배 전의 추사 글씨가 중국의 영향을 받아 획이 기름지고 두터우며 윤기가 흘렀다면 유배시절에 완성된 추사체는 기름기가 다 빠지고 메말라 대단히 명상적이라고 말한다. 대정향교를 오가며 보았던 단산의 골격만 남은 모습을 보고 추사체를 완성했다는 말은 이래서 나왔다.
단산은 여느 오름에 비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면 40여분 동안 흘린 땀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한라산을 비롯해 산방산, 형제섬, 송악산, 수월봉 등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지고 화산재가 날아다니던 들판은 새봄을 맞아 노란색과 초록색으로 곱게 단장을 하고 있다. 그 사이로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과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실오라기처럼 펼쳐진다. 오름 동쪽의 칼날능선 주변에는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보리수나무가 지천이다.
산방산탄산온천을 돌아 나오면 돌담이 아름다운 덕수리 마을이 반긴다. 덕수리는 현재까지도 불미공예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전통마을이다. ‘불미’는 풀무를 뜻하는 제주어로 무쇠솥, 쟁기의 보습, 낫, 호미 등 쇳물로 농기구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무쇠솥 대신 양은솥이 등장하고 쟁기 대신 경운기가 자갈밭을 갈면서 농기구를 만들 일은 없지만 덕수리 불미마당에서는 기능보유자를 중심으로 작업을 할 때 부르던 ‘불미노래’를 비롯해 불미공예가 맥을 이어오고 있다.
‘산방산·용머리해안 지질트레일’ A코스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은 산방산과 용머리해안 사이에 위치한 산방산 주차장으로 산방산을 비롯해 용머리해안 일대, 형제섬, 마라도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80만 년 전 화산활동으로 탄생한 산방산(395m)은 지름이 1200m로 다른 화산과는 달리 정상에 분화구가 없고 돔 모양으로 생겼다. 산방산에는 깎아 세운 듯한 절벽에 산방굴로 불리는 해식동굴이 위치하고 있고, 주상절리와 타포니(tafoni) 등 특이한 형태의 지질도 발달되어 있다.
신기하게도 산방산의 깎아지른 절벽에는 구실잣밤나무, 참식나무, 후박나무, 생달나무, 돈나무는 물론 풍란 등 암벽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산방산 암벽식물지대는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3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맞바람이라도 불면 걸음을 걷기조차 힘든 산방산 주차장 아래에는 무시로 파도가 몰려와 하얗게 무서지는 용머리해안이 위치하고 있다.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하멜이 1653년 산방산 앞바다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원래의 목적지인 일본으로 가지 못하고 산방산 인근 모슬포에 상륙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제주도=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