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MCA, 새로운 100년의 약속] (14) ‘오방의 향기’로 걸어온 광주 YMCA

입력 2014-04-10 02:30


日帝때 지·덕·체 운동… 광복 후 시민운동 전개

광주YMCA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민족의 울분이 가득했던 때였다.

일제 탄압으로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듬해인 1920년 민족을 사랑하는 교회 청년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Y 이름으로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이다.

하지만 광주 지역에서 Y 활동은 학생Y를 중심으로 이미 이어져오고 있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의 교육부 간사였던 이승만 박사의 광주 순회강연을 계기로 1911년 조직된 숭일학교 학생Y의 전도대 활동이 효시였다. 1914년에는 Y연합회(현 한국Y전국연맹) 설립 시 총대를 파송했고, 이듬해에는 광주에서 학생Y 하령회가 열렸다.

광주Y 창설은 ‘민초들의 아버지’로 불렸던 ‘오방(五放) 최흥종(1880∼1966)’ 목사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기독 청년 30여명이 주축이 됐다. 초창기 광주Y 주요 사업은 지·덕·체 운동이 주된 목표였다. 이를 위해 순회 전도대회를 열고 북문밖교회에 광주유치원을 개원하는 한편 서북여자야학과 숭일학교 노동야학도 개설했다.

광주Y는 창립 5년째에 접어들면서 농촌사업에 팔을 걷었다. 광주 부근의 농촌마을에 농민 강습소 8곳을 설치한 데 이어 충장로 5가에는 지역 최초 회관인 ‘충장로 회관’(일명 수기동회관)을 짓고 유도, 역도, 기계체조 등 체육활동 보급에 앞장섰다. 1931년에는 소년척후대(현 보이스카우트)를 조직, 활동 범위를 10대 학생들로 확대했다.

광주Y가 수난기에 접어든 때는 1930년대 후반. 일제 탄압이 극심해지면서 1938년 10월 조선기독교청년회가 일본기독교청년회에 강제 편입됐다. 광주Y도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1944년 12월 자진 폐회하기에 이른다.

광주Y의 재건총회는 광복 후 한 달 뒤인 1945년 9월에 열렸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청소년운동을 재개하고 지역사회를 위한 사회운동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1949년에는 전남대와 조선대에 대학Y와 5개 하이(Hi)Y 클럽을 조직하면서 학생부 활동을 강화했다. 농촌지도자를 양성하는 삼애학원을 설립한 것도 이 즈음이다.

1964년 11월 현재의 금남로 1가로 둥지를 옮긴 광주Y는 건물 3층에 체육관을 갖추면서 청소년 교육 및 시민문화 운동의 중심이 돼왔다. 1970년대 들어서는 시민논단과 신학강좌, 십대의 광장, 신용조합운동 등 사회개발 사업을 이어왔다. 1978년부터는 일본 요코하마Y 및 필리핀 마닐라Y, 중국 상하이Y 등과 국제교류 사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광주Y는 또 한 차례 시련을 겪는다.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광주Y의 많은 지도자들이 옥고를 치르면서 Y프로그램도 위축됐다. 하지만 Y중등교사협의회가 ‘교육민주화선언문’을 발표하고 ‘민주교육실천대회’를 여는 등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86년에는 광주Y 시민중계실이 출범했고, 1990년대에는 ‘청소년 유해환경감시단’ ‘청소년인권센터’ ‘청소년종합상담실’ 등 청소년 프로그램을 주로 펼쳤다. 2개 지회와 복지센터 등도 건립됐다.

2000년에는 광주Y 창립 80주년을 기념해 ‘비전 2020’을 선포한 데 이어 창립 90주년인 2010년에는 비전 2020을 수정 채택했다. 구체적인 비전 실행전략으로는 2020년까지 1만명 비전교육, 마을Y센터 20개 구축, 아시아 청소년자립지원센터 개소 등이다.

안평환 사무총장<광주YM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