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작가 이정명, 런던서 윤동주 옥사 다룬 영문판 사인회
입력 2014-04-08 20:37
[쿠키 문화] 영국 런던의 번화가 레스터스퀘어 뒤편의 세실코트는 유서 깊은 헌책방 거리다. 17세기 셰익스피어 시대의 책부터 ‘피터래빗’ 등 대표적인 그림책 삽화들, 해리포터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영국은 물론 세상을 반하게 만들었던 온갖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세실코트 초입에 자리한 골즈버러(Goldsboro) 서점에서 7일(현지시간) 소설 ‘뿌리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 등으로 인기를 얻은 한국 작가 이정명(49)의 사인회가 열렸다. 서점 주인 데이비드 해들리(40)씨는 작가의 친필 사인이 담긴 초판본 판매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15년 넘게 이곳을 꾸려나가고 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초판본, 해리포터를 쓴 조앤 K. 롤링이 가명으로 펴낸 ‘쿠쿠스 콜링’ 등의 초판본은 2500파운드에 판매된다. 영국은 물론 미국 캐나다 호주 프랑스 스페인 중국 등 전 세계적으로 온라인 고객들이 책을 산다.
해들리씨는 지난달 27일 영국의 유명한 문학출판사 맥밀란에서 출간한 ‘별을 스치는 바람’의 영국판 ‘The Investigation’을 보고 작품이 매우 아름다운 현대적인 고전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해 이 작가에게 사인회를 요청했다. 이정명은 이날 30분 넘게 혼자 책상에 앉아 서점 직원이 건네주는 초판 250권에 일일이 사인을 했다.
2012년 국내 출간됐던 이 책은 시인 윤동주가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기 전까지 알려지지 않은 수감 생활에 작가가 상상력을 더해 만들어낸 미스터리 팩션이다.
큰 줄거리는 형무소에서 악명 높던 간수 스기야마 도잔이 살해되고, 학도병 출신의 어린 간수 와타나베 유이치가 그 사건을 풀어나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감자들의 편지를 검열하던 스기야마가 윤동주의 글과 시를 통해 변화하는 모습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무엇보다 ‘서시’ ‘자화상’ 등 윤동주의 시 20여 편이 전문 그대로 책 속에 등장한다. 생체실험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기까지 젊은 시인의 모습이 잔잔하지만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정명은 인터뷰에서 “소설이 번역된 것도 좋지만 그보다 윤동주 시인의 시가 외국의 독자들과 만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저에겐 더 의미 있고 행복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학시절 일본 교토의 동지샤 대학에서 우연히 초라한 윤동주 시인의 기념비를 본 기억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길지 않았던 시인의 생애 중 대부분은 자료를 통해 알려져있지만, 감옥에 수감된 뒤 생애 가장 처참하고 있든 시기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었다”며 “그 기록의 공백을 상상으로 한 번 채워넣고 싶다는 욕망이 있어 집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소설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번역했던 김지영씨가 윤동주의 시 자체도 새롭게 공들여 번역했다. 한국에서 책이 나오기도 전에 영국 프랑스 등 해외 5개국에 판권이 수출됐고, 3개국이 더 추가됐다.
작가는 “해외 출판사 분들이 수용소라는 비인간적이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문학과 예술을 통해 인간성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고 하더라”며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문화와 상관없이 서로 통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인 배경 지식이 없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커다란 역사의 줄기 속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도 외국인들이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요인이 됐다.
‘팩션’이라 불리는 장르의 소설을 쓰다보니 역사 왜곡 논란 등 여러 문제를 제기하는 독자들도 있다. 그는 “제가 쓰는 건 소설이고,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쓰는데 받아들이는 분들은 다른가 보다”며 “사실이 아닌 것을 통해서 사실을 좀 더 명확하게 할 수 있다면 의미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가령 그가 썼던 ‘뿌리깊은 나무’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은 진실을 찾기 위한 일종의 진입로라 할 수 있다”며 “그걸 통해 세종의 진면모에 대해 다시 알게 되고, 또 독자들이 책에서 다 하지 못한 객관적인 진실을 알기 위해 접근하는 루트가 될 수 있다면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른바 장르 소설을 ‘B급 문학’으로 엄격하게 분류하는 국내 분위기와 달리 추리소설이 강세를 보여온 영국 측에서는 이 작가의 작품에 주목하며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국내 여러 기관의 조율을 거친 끝에 이 작가가 이번 도서전에 참가하는 국내 작가 10명 안에 포함되지 않자 영국 측에서는 내심 안타까워했다는 후문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이정명은 크게 마음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그동안 한국 문학계의 문단 시스템을 통해 문학계가 발전해왔고, 그런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도약대가 돼서 제 책이 영국에서 출간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런던도서전의 공식 행사는 아니지만 8일(현지시간) 얼스코트 전시장에서 맥밀런 출판사 주최로 KL매니지먼트, 미국 에이전트와 공동으로 간담회를 가진다. 이어 10일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어판 출간 기념 행사에 참여할 예정이다. 런던=글·사진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