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이 거부하면 신청 각하… 의료분쟁조정제 유명무실

입력 2014-04-09 02:04


대장에 작은 혹이 생긴 A씨(64·여)는 지난해 4월 서울의 한 병원에서 용종 제거 수술을 받은 뒤 극심한 복부 통증을 느꼈다. 수술도구가 대장 벽을 찔러 천공(구멍이 뚫리는 경우)이 생긴 것이다. 응급수술을 받은 A씨는 퇴원 후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의료사고 여부를 가려 달라”며 조정신청을 냈다. 하지만 되돌아온 답은 ‘신청각하’였다. 병원 측이 조정 절차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에는 협심증을 앓던 B씨(42)가 흉통을 호소하며 병원에 갔다가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B씨 아내는 “병원 측 오진이 사망 원인”이라며 중재원에 조정을 신청했지만 얼마 뒤 “신청이 각하됐다”는 답변을 받았다. 역시 병원 측 거부 때문이었다.

2년 전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개원한 뒤 의료사고로 분쟁조정을 신청하는 환자들은 꾸준히 늘고 있지만 조정 실적은 여전히 미미한 것으로 나타났다. 피신청자인 의사나 병원이 동의하지 않으면 조정 절차 자체가 개시되지 않는 제도가 원인이었다.

8일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따르면 조정·중재 신청 건수는 개원 첫해인 2012년 월평균 56건에서 지난해 월평균 117건으로 배 이상 증가했다. 2년간 접수된 건수는 총 2278건이다. 하지만 이 중 절반 이상인 1292건은 A씨처럼 의료기관의 거부로 아예 조정 절차를 시작하지 못한 채 각하됐다. 피신청인의 동의를 받아 조정이 시작된 건수는 지난 2년간 912건(조정참여율 41.4%)이었으며 이 중 510건(조정 성공률 55.9%)에 대해 조정이 이뤄졌다.

신청된 사건 10건 중 6건이 각하되는 이유는 현재 의료중재원의 조정 개시 여부가 전적으로 피신청인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피신청인이 받아들이면 의료중재원은 감정 절차를 거쳐 조정을 시작한다. 하지만 거부하면 신청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사건은 바로 각하된다. 이는 언론중재위원회나 환경분쟁조정위원회, 한국소비자원 등 중재를 담당하는 기타 기관에서는 볼 수 없는 체계다.

환자단체연합 안기종 대표는 “언론중재위원회도 조정신청이 들어오면 일단 조정 절차가 시작되고 소비자원도 자동으로 개시하게 돼 있다”며 “의료중재원만 피신청인 동의가 필요한 데다 조정을 신청 한 뒤 14일 동안 피신청인으로부터 응답이 없으면 자동 기각되는 불합리한 방식”이라고 비판했다.

의료분쟁 전문 이인재 변호사도 “강제조정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의료중재원의 최대 약점”이라며 “피해자들은 의료사고에 대해 쉽게 이의제기를 하고 의료진은 조정신청에 반드시 응하도록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새정치민주연합 오제세 의원은 지난달 피신청인의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조정을 시작한 후 피신청인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중재원 기능을 개선하는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에 관한 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