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속 세상] “전하, 충심을 다해 궁궐 문을 지키겠나이다”
입력 2014-04-09 02:09
경복궁 수문장 임명·교대의식 재현 현장
봉건왕조에서 도성의 궁궐 정문은 체제 그 자체를 의미하는 상징성을 지녔다. 오직 왕만이 다닐 수 있는 길(어도·御道)이 난 문이었기에 그 문을 지키는 수문장(守門將) 역시 왕실 호위의 대표성을 걸머졌다.
역대 조선의 왕들은 자신의 거처를 지키는 ‘보안 책임자’에게 각별한 신경을 기울였다. 특히 수문장은 임명 과정부터 왕이 직접 관여했고, 책임에 부합되는 품계와 의전을 부여했다. 조선왕조실록 예종 1년(1469) 5월 기록에는 ‘별도로 수문장을 세우고, 패(牌)를 만들어 낙점한다’는 임금의 교지가 등장한다.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도 ‘겸사복(兼司僕·친위기병)과 내금위장(內禁衛將·최측근 호위무관), 수문장은 왕의 지명을 받는다’는 대목이 나온다.
지난달 30일 경복궁 흥례문에서 선보인 ‘수문장 임명의식’은 궁궐 경비대장의 위상과 위용을 사실적으로 보여줬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주최한 임명의식은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왕이 직접 행차해 수문장을 임명하고 축하하는 의식을 재현했다. 면밀한 고증을 거친 수문군(守門軍)의 의복과 무기,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의례는 궁궐 수비대와 왕실 의장대를 겸하는 무관 조직의 실용성과 심미성을 동시에 드러냈다.
연중 행사인 임명의식과 별도로 하루 세 차례 선보이는 수문장 교대식은 한국의 역사와 전통을 보여주는 대표 문화상품으로 이미 자리를 잡았다. 고궁 수문장의 존재는 역사의 공간에서 사실적으로 재탄생한 역사의 장면이 영화나 사극 이상으로 효과적인 문화자원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절도 있게 교대식을 마치고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는 수문장 곁엔 함께 사진을 찍으려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붐빈다.
6일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에서 만난 영국인 관광객 로버트 브라우니(47)씨는 “런던 버킹엄궁 왕실 근위병 교대식이 연상된다”면서 “실제가 아닌 재현임에도 의복과 의식 절차가 사실적이어서 특히 인상적”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원래 위치에 중건된 광화문 앞에는 오늘도 붉은 철릭(天翼·두루마기 관복) 차림의 수문장이 지휘권을 상징하는 등편(藤鞭·무관의 말채찍)을 들고 서 있다. 그 곁으론 햇빛을 튕겨내는 월도(큰 칼)를 움켜쥐고 활과 환도(작은 칼)를 허리에 찬 수문군들이 매서운 눈빛을 뿜어낸다. 사대부의 정치와 선비의 나라로 때론 문약하게 여겨졌던 조선의 중심에 군주의 복심인 충성스러운 무사들이 있었음을 웅변하는 듯하다.
사진·글=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