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임순 (10) 애광학교 신축 위해 정부는 법 바꾸고 기업은 기부를…

입력 2014-04-09 02:15


막사이사이상 상금 1800만원을 들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대우그룹이었다. 김우중 회장에게 “상금 1800만원을 다 내어놓을 테니, 우선 건물부터 지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김 회장은 나중에 갚아도 된다며 건축을 시작했다.

신축 과정에서 법률도 일부 개정됐다. 당시는 사립기관이 정부로부터 건축비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했다.

“장애 때문에 사회에서 받아주지 않는 아이들이에요. 심지어 부모가 버린 아이들도 있어요. 오갈 데 없는 이 아이들을 국가에서 지원해주지 않으면 이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가란 말입니까. 장애인들이 마음껏 이동할 수 있는 좋은 시설에서 보살피고, 조금 더 효과적으로 가르치려는데 법이 가로막으면 저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일을 하란 말입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법을 고쳐주세요.”

결국 국회는 법을 일부 수정했고, 애광원은 정부로부터 건축비 일부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화여대 가정대학 동문회, 미주지역 후원회, 성신양회 등 그동안 애광원을 후원했던 모든 기관이 애광학교 신축을 위한 모금에 동참해 주었다. 결국 애광원은 극적으로 3년 만에 2억원을 제외한 나머지 건축비를 마련할 수 있게 됐고, 시공사에 건축비를 지급했다. 잔금 2억원은 대우그룹에서 받지 않기로 했다.

신축과 함께 장애인 전문 시설로 다시 태어난 애광원과 애광학교에서 나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일어설 수 없을 것 같던 아이가 제 발로 섰을 때, 말을 못할 것이라고 포기했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엄마!’라고 소리쳤을 때, 제 힘으로 옷을 입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아이가 누운 채 제 손으로 바지를 갈아입었을 때…. 문득문득 벅차오르는 감동에 눈물을 흘렸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루는 영봉이라는 갓난아기가 애광원 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 내려가 살펴보니 다리가 심하게 뒤틀린 뇌성마비 장애아였다. 영봉이는 세 살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몸을 뒤집을 수 있었을 정도로 발달이 느렸다. 나는 영봉이를 위해 독일에서 특수 물리치료를 전공한 교사를 모셔오고, 매일 팔과 다리, 어깨 등 근육이 굳은 부분에 근육이 되살아날 수 있도록 자극을 줬다. 날마다 강도 높은 치료와 훈련을 4년간 지속했다. 안타깝게도 치료의 효과는 거의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영봉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의 어느 날, 영봉이를 담당하는 교사가 상기된 표정으로 급히 나를 찾아 왔다.

“원장님, 빨리 좀 와 보세요. 영봉이가 일어섰어요!”

바로 달려가 보니, 다소 비틀거리긴 해도 일곱 살 영봉이가 제 발로 서 있었다. 영봉이와 교사·보모들과 함께 흘린 그날의 눈물이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그동안 애광학교를 통해 많은 장애아동들이 교육을 받고 학교를 떠났다. 하지만 나는 졸업 후의 아이들이 걱정됐다. 그래서 성인 지체장애인을 위한 직업재활시설 ‘애빈’을 세우게 됐다. 애빈에서는 애광학교를 졸업한 아이들과 성인 지체장애인 중 사회 진출을 목표로 하는 이들이 직업훈련에 임한다. 저마다 제과와 제빵, 도예와 수공예, 섬유직조와 직물 기술, 서비스 기술 등 다양한 기술을 배운 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택해 사회진출을 시도한다.

애빈 교육생 가운데 성과가 좋은 이들은 취직을 해 사회진출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막상 이들이 생활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애광원은 1997년 창립 45주년을 기념해 성인 장애인의 공동생활관 ‘성빈마을’을 세웠다. 5층 건물에는 식당과 숙소가 마련돼 있고, 사회복지사의 도움을 받아 아침마다 자신의 일터로 출근한다. 또 요리 등 자립이 가능한 장애인들은 더 작은 규모의 생활공동체를 만들어 서로를 도우며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 이 같은 그룹홈이 현재 여섯 가정 정도 운영되고 있다.

정리=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