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란 이름의 질병-(2부) 자살 치료 울타리를 넓혀라] 5. 자살 백신을 위한 4개의 키워드
입력 2014-04-08 02:49
자살시도자 48.2%가 술 마신 상태서 극단적 선택
자살이라는 질병의 완치를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스트레스 완화, 패자 부활이 가능한 시스템, 가정의 회복 등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지만 단시일에 이루기 어려운 난제들이다. 정신보건 전문가들은 단계적으로 자살률을 낮추려면 먼저 네 가지 요소를 관리해 1차 ‘자살 백신’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살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첫 단계는 알코올, 자살수단, 게이트키퍼, 언론보도의 네 가지 키워드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놈의 술
강원대 정신건강의학과 박종익 교수팀이 지난해 발표한 ‘2012년 자살실태조사’에 따르면 자살시도자의 48.2%는 술을 마신 상태에서 자살하려 했다. 자살을 시도해 7개 병원에 실려온 465명을 조사한 결과다. 연령대별로 13∼25세의 33.0%, 26∼40세의 55.7%, 41∼60세의 58.2%, 61세 이상은 35.0%가 자살 시도 전 술을 마셨다.
술김에 자살을 시도한 것인지, 죽음의 공포를 줄여보려 술을 마신 것인지는 좀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다만 자살과 술이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 건 분명하다. 국립중앙의료원의 ‘음주와 자살 심포지엄’(2011년) 자료에 따르면 우울증이 있는 알코올중독자 중 70% 이상이 평생 한 번 이상 자살을 시도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자살 고위험군인 이들이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까지 술을 마시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술을 마시면 우울증세가 심해지거나 판단력이 흐려져 자살 시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라목손을 없앴더니
자살 수단이 눈앞에 있어서 홧김에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도 많다. 우발적인 행동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예가 ‘그라목손’이다. 2011년 말 시장에서 퇴출되기 전까지 이 제초제는 효능이 좋아 농가의 필수품이었다. 그러나 독성이 강해 한 모금만 마셔도 사망할 정도로 치사율이 높다. 이 ‘극약’이 시장에서 퇴출되자 제초제 등 농약을 이용한 자살 시도자가 2010년 2719명에서 2012년 2103건으로 23%나 줄었다.
지하철 승강장의 스크린도어도 같은 현상을 말해준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08년 49명이 지하철 선로로 뛰어들어 자살했다. 이 수치는 대다수 승강장에 스크린도어 설치가 완료된 2012년 1명으로 드라마틱하게 감소했다.
반면 전문가들은 서울 마포대교 ‘생명의 다리’ 공익광고는 역효과를 냈다고 본다. 서울시 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마포대교에서 발생한 투신 시도는 93건으로 공익광고 전인 2012년 15건에 비해 6배 이상 증가했다. 자살을 막으려는 공익광고조차 자살수단을 알려주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정택수 한국자살예방센터장은 “자살수단 홍보는 자살을 자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게이트키퍼(Gatekeeper)
보건복지부와 중앙자살예방센터가 적극적으로 양성하는 ‘게이트키퍼(Gatekeeper)’도 주목받고 있다. 게이트키퍼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자살을 고려하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하며, 이후 전문가에게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통칭한다.
자살을 막으려면 어떤 사람이 자살을 고민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일반인은 자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편견이 많아 쉽지 않은 실정이다. 얼굴을 매일 마주하는 가족조차 자살 신호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충남 광역정신건강증진센터의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자살자의 가족 등 주변인 가운데 무려 76%가 자살 징후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중앙자살예방센터는 지난해부터 게이트키퍼들에게 한국형 자살예방 교육프로그램으로 개발된 ‘보고 듣고 말하기’ 교육을 시행 중이다. 지난해에만 3만5000명이 교육을 받고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다. 올해는 모두 4만5000∼5만명의 게이트키퍼를 양성할 계획이다. 센터 관계자는 “누구나 오프라인 교육 3시간이면 자살을 막는 게이트키퍼로 활동할 수 있다”며 “자살예방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효과가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자극적인 언론
절제된 언론보도 역시 자살예방에 필수적이다. 중앙자살예방센터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유명 연예인의 자살 보도는 일반인 자살 보도보다 모방자살 가능성이 14.3배나 높았다. 특히 유명 연예인이 자살했을 때 평균 600명이 영향을 받아 자살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유명 연예인 자살 이후 2개월과 전년도 같은 기간의 자살자 수치를 비교해 평균을 낸 결과다. 배우 최진실씨 죽음의 경우 1000명이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자살 수단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배우 안재환씨 자살 후에는 차량 안에 번개탄을 피우는 자살이, 최진실씨 사건 이후에는 목을 매는 자살이 증가했다.
박종익 강원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사회 정의에 도움이 되는 보도가 아니라면 연예인 자살은 사망 사실만 알리는 게 옳다”며 “모방자살을 줄이려면 언론과 독자 모두 자살과 관련된 정보 제공은 적을수록 좋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요진 기자 tru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