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병권] 사생관
입력 2014-04-08 02:32
죽음을 앞둔 사형수만큼 살아 있음을 갈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김대중 정부 이후 사형 집행이 없어 국제사회에서는 사실상 준사형폐지 국가로 간주된다. 그렇지만 형법상 형벌의 종류 가운데 엄연히 사형 조항이 살아 있어 검찰이 사형을 구형할 수 있고, 법원도 이를 선고할 수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형을 집행할 수도 있다.
교도관들이 전하는 사형수의 최후를 들어보면 죽음에 직면한 사람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한국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이른바 10·26사건 주모자들의 사형 집행을 직접 목격한 교도관으로부터 이들의 최후를 들은 적이 있다. 섬뜩하기도 했지만 분명한 사생관(死生觀)의 필요성을 새삼 느꼈다.
장군 출신인 주모자는 당당했던 법정에서의 최후진술이나 사후에 공개된 그의 옥중일기와 달리 교수형에 처해지기 전 거의 실신상태였다고 한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묵주를 쥐고 죽기를 원했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사형수는 몸에 아무것도 지닐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하 한 명은 어린 아들에게 꼭 전해 달라며 유언을 남긴 채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여 교도관들조차 깊이 감동받았다고 한다. 남자답게 살다가 죽었으니 결코 다른 사람에게 기죽지 말고 살아가라는 것이 유언이었다.
대체로 죽음 앞에 당당한 사람들은 평소 사생관이 분명한 경우가 많다. 역사상 위인들은 죽음 앞에 떨지 않았다. 정암 조광조를 비롯, 우암 송시열 등 우리 선비들은 자신들이 받들어 모신 임금으로부터 사약을 받고도 세 번 절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선진국을 자부하는 우리가 아직도 창피스러운 자살률 세계 1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공동체 모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묘책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우리 청소년들에게 명확한 사생관을 심어주면 어떨까. 초개같이 목숨을 던질 순간을 준비하고 있다면 충동적인 행동이 좀 줄지 않을까.
중세 유럽의 수도사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서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인사했다.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늘 죽음을 기억하는 삶 속에서 자신을 뒤돌아보고, 점검하고, 반성하며 충실하게 살라는 다짐 아니었을까.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자중자애하는 삶이 되는 데 힘썼으면 좋겠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