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임순 (9) 막사이사이상 수상 영예에 “주님 감사합니다”

입력 2014-04-08 02:34


1984년 독일의 애광원 후원회장이었던 어빈 크루제 목사의 초청으로 나는 독일 장애인 교육기관인 프뢰벨 특수학교를 견학할 수 있었다. 장애인을 위한 전문 설비가 완비된 프뢰벨 특수학교의 모습과 시스템은 한마디로 대단했다. 학교를 둘러보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나의 울음에 크루제 목사가 걱정 어린 눈길로 불편한 게 있느냐고 물었다.

“목사님, 부러워서요. 독일의 장애인 아이들은 이렇게 좋은 시설에서 효과적인 교육을 받고 있는데, 열악한 시설에서 생활하는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요. 원장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참 부끄럽네요.”

이 말을 들은 크루제 목사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애광원은 1987년 프뢰벨 특수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1984년 독일 방문으로 시작된 인연은 1986년 프뢰벨 특수학교 측의 애광원 방문으로 이어졌고, 이듬해 양 기관의 자매결연으로 열매를 맺었다. 애광원과 애광학교 선생님들이 프뢰벨 특수학교에서 장애아동 치료법 등을 배워 더 전문적인 교육을 실시할 수 있게 됐다.

1989년 8월, 나는 예상하지 못한 영예를 얻었다. ‘아시아의 노벨평화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사회지도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던 것이다. 막사이사이상은 195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필리핀의 전 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58년 설립된 막사이사이 재단이 수여해 온 국제적인 상이다. 한국인 가운데는 장준하 선생(1962), 김활란 박사(1963), 장기려 박사(1979)가 앞서 수상했다.

8월의 마지막 날, 필리핀 마닐라에서 진행된 시상식에서 막사이사이 재단은 ‘한국전쟁 이후 애광영아원을 설립해 고아와 정신지체 장애아동을 돌보고, 가난한 섬 주민의 복지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노력을 인정해 상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나는 당시 수상소감문에 “지난 38년간 힘에 겨운 삶을 살았지만 사랑하는 어린 눈망울들의 평화로운 시선이 용기와 희망과 격려가 됐다. 무엇보다 27세의 풋내기가 얼떨결에 하나님께 서원한 기도가 나를 오늘날까지 이끌었다”고 적었다.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이 상은 내게 주어진 상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애광원의 장애아동들과 이들을 위해 이름도 빛도 없이 온 정성을 쏟아 준 직원 및 후원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광학교는 설립 후 10년 가까이 1950년대에 지어진 낡은 건물에서 수업을 했다. 건물이 오래되다 보니 장애인 특수학교로서의 기능을 하기 어려웠다. 장애아동들이 쉽게 이동할 수 있고, 각종 교육활동을 할 수 있는 새 건물이 꼭 필요했다.

나는 독일 방문 시 소개받은 건축가 강병근 선생에게 연락해 설계를 맡겼다. 독일에서 장애인 건축을 공부한 그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장애인들에게 꼭 필요한 건물을 설계해 줬다. 하지만 문제는 건축비였다. 설계도대로 지으려면 당시 돈으로 18억5000만원이 필요했다.

가난한 사회복지단체인 애광원에는 그만한 자금이 없었다. 하지만 돈이 없다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상황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한 건축을 시작해야만 했다.

막사이사이상 수상금 3만 달러를 마중물 삼아 건축을 시작됐다. 당시 환율은 달러당 600원쯤이었는데 상금은 1800만원 정도여서 건축비의 1%가 채 안됐다. 그때부터 나는 건축비 마련을 위해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정리=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