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란 이름의 질병-(2부) 자살 치료 울타리를 넓혀라] 4. 자살예방 정보 허브를 구축하라(미국)
입력 2014-04-07 02:31
“각개전투론 역부족” 전국 民官기관 거미줄 정보 공유
1997년 미국 워싱턴의 연방 의회 앞에는 자살자 유가족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정신적으로 너무 고통스럽다” “먹고살 길이 막막하다” “우리 자녀를 보살펴 달라”…. 이들은 고통을 호소했고 미국 의회와 정부는 당황스러웠다. 국방부는 군 자살자, 약물남용·정신건강청(SAMHSA)은 정신보건 서비스,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각종 데이터를 연구하며 나름대로 자살 관리 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유가족들의 호소에 마땅한 대책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당시 의회에 근무했던 제리 리드(59) 박사는 “유가족들은 자살 피해 대책과 지원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지만 정부는 국가적 전략을 갖고 있지 못했다. 당시 미국은 자살이 예방 가능한 죽음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후 수년간 전문가들이 지속적으로 국가적 해결 방안을 요구하자 정부는 모든 부처와 민간기관의 자살 대책을 한데 묶어 길라잡이할 기관을 만들기로 했다. 2005년 이렇게 탄생한 곳이 미국 자살예방 정보의 허브(Hub)인 ‘자살예방자원센터(SPRC)’다. 지난달 3일 워싱턴 토머스제퍼슨가(街)의 SPRC를 찾았다.
자살예방사업의 허브 구축
SPRC의 근무 인원은 고작 30여명이다. 그러나 이곳은 3억명 미국인의 자살에 관한 모든 정보를 갖고 있다. 공공·민간 영역을 통틀어 유일한 자살 정보 집결지다.
미국의 자살률(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은 1990년까지 꾸준히 12명 이상을 기록하다 2000년대 초반 10명 수준까지 하락했다. 그런데 이후 금융위기 등으로 자살률이 다시 높아져 2010년에는 12.5명이 됐다.
SPRC는 이런 변곡점에 탄생한 기관이다. 정부기관과 시민단체, 민간 연구자들이 고군분투했지만 종합적인 자살 대처에 역부족이었다는 반성에서 출범했다.
미 의회는 2002년 SPRC를 구상하며 자살예방을 위한 ‘최고의 실행방법’을 모으라고 주문했다. 이에 SPRC는 효과적 정책이나 프로그램을 축적한 ‘기록보관소’를 갖췄다. 과거 수십년간 시행됐던 미 정부의 자살예방 프로그램 125건의 성과와 시행착오 등이 빼곡히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직장 내 자살 사후관리를 위한 매니저 가이드’는 자살 사고 이후 행동단계를 알려주고 있다. ①자살한 직원과 유족의 사적인 권리를 보호하라 ②유가족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라 ③동료들에게 필요한 정신건강 서비스 등을 신속히 마련하라 ④직원들이 건강한 방식으로 애도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 ⑤자살자의 기일 등을 챙기며 자살예방 위주의 대책을 시행하라…. SPRC 관계자는 “SPRC는 이런 프로그램을 자료로 축적해 시대에 맞춰 보완하고 발전시켜 가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SPRC는 미국에서 진행되는 모든 자살 연구를 총괄·정리하는 특별팀도 꾸릴 계획이다.
공공·민간이 매트릭스처럼 연결
SPRC가 허브 역할을 하지만 그렇다고 자살예방사업을 진두지휘하진 않는다. 미국의 자살예방사업에는 수많은 공공·민간 기관이 매트릭스처럼 연결돼 있다. SPRC에서 지하철로 20분 떨어진 위스콘신가(街)에서 미국자살학회(AAS) 래니 버만(70) 학회장을 만났다. 그는 “AAS의 임무는 자살예방 관련 기관의 훈련·연구를 촉진해 성과를 높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1968년 설립된 AAS는 자살예방사업에 질적 기준을 도입했다. 상담의 질적 수준, 이용자의 타 기관 연계 서비스 등 13개 항목에서 기관을 평가한다. 협회의 인증을 받으면 자살예방사업을 시행할 수 있는 자격이 최대 5년간 주어진다.
최근에는 자살 직전 징후를 연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울증·불안은 물론 잠을 못자거나 땀을 많이 흘리거나 소통과 대화를 포기하는 등의 증상을 이혼·해고·채무 등 주변 상황과 연계해 자살 시도 가능성을 예측하는 연구다. 버만 박사는 “자살할 사람들이 어떤 양상을 보이는지 안다면 가족이 미리 도울 수 있다”며 “자살자들의 마지막 30일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SPRC와 AAS는 공공기관도, 민간기관도 아닌 채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한다. 정부는 자살예방사업에서 주로 인프라 구축을 담당한다. 정부기관인 SAMHSA는 응급실 기반의 자살시도자 관리, 중년층을 위한 직장 내 예방교육 등 위험군에 접근할 다양한 거점을 마련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SAMHSA의 리처드 매키언(63) 박사는 “자살을 막는 단 하나의 최고 기관은 존재할 수 없다”며 “정부나 전문가뿐 아니라 전 국민이 자살 시도자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자살예방에 참여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워싱턴=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