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우선덕] 거룩한 비둘기

입력 2014-04-07 02:29


비둘기들이 아장걸음으로 왔다 갔다 한다. 어느 비둘기는 발목이 없고 어느 비둘기는 한두 개씩 발가락이 없다. 성치 않은 비둘기가 왜 있는지는 다른 기회에 이야기하자. 어느 비둘기는 외발인 채로 종일 수고하지만 딱히 먹을 게 없다. 도로경계석 아래로도 무시로 내려가 무엇인가를 쫀다. 차량이 쌩 달려온다. 악, 헉! 다행이다. 차바퀴 바로 앞에서 비둘기는 파드득 비킨다. 경계석 아래에도 먹을 것은 없다.

비둘기가 취객의 토사물 등으로 연명한다는 현실을 아는 이는 안다. 추운 날씨면 새들은 공기로 깃을 부풀린다. 그래서 뚱뚱해 보이는 비둘기에게 무식한 인간은 ‘닭둘기’라는 오명을 씌웠다. 탐욕스럽고 인색한 자의 눈으로 보니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도시에 놓인 야생동물은 다 비슷한 상황이다. 오로지 척박하며 열악한 터전. 여기에 ‘유해동물’이라는 낙인마저 찍힌 생명의 생존은 어떠하랴. 반가운 손님 까치에 이어 평화의 상징으로 수입도 불사, 각종 행사에 쓰인 비둘기에게도 ‘유해조류’란 주홍글씨가 붙었다.

비둘기의 세균이 사람에게 병을 옮길지 모르기 때문이란다. 새 전문가와 의학자는 ‘비둘기와 연관된 사람의 질병이 아직 보고된 적 없다’고 단언한다. ‘비둘기의 똥오줌으로 민원이 답지해서’라는 죄명도 있다. 사람의 똥오줌이 지구오염 원인 중 하나인 건 괜찮은 모양이다. 비둘기가 더럽다는 죄목도 있다. 천만에. 비둘기는 목욕을 좋아한다. 물 목욕, 흙 목욕을 하며 깃을 고르고 말리고 가꾼다. 비둘기가 더러운 건 목욕은커녕 마실 물도 주지 않는 도시의 몰인정한 환경 탓이다. 야생의 생존은 어느 가혹한 운명의 사람보다 눈물겹다. 게다가 ‘유해조류’ 비둘기는 독극물로 죽여도 된다는 언도를 받은 셈이다. 알 품은 둥지를 거둬 태우는 건 소위 인도적인 처사라나. 감히 인간님을 불편하게 하면 어찌 되는지 생생하게 본때를 보여준다.

누가 그런 권한을 주었는가. 사람은 오늘도 오만과 이기심의 바벨탑을 쌓는다. 신의 노여움에 한순간이면 무너질 탑을. 그중 상식이 있는 자는 말한다. 사람만큼 유해한 동물이 지구상에 또 있겠는가고.

무릇 종교의 성인성녀는 죄도 없이 핍박과 학대와 고난을 당하지 않은 분이 거의 없더라. 다른 나라 사정은 모르겠다. 적어도 우리나라 도시에 사는 비둘기에게 진정 이 이름을 바치고 싶다. 성(聖) 비둘기.

우선덕(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