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기획] 서울 한가람고 수업현장… 1·2·3학년 구분없이 스스로 학습
입력 2014-04-07 02:55
#1 오는 11월 대입 수능을 앞두고 있는 서울 한가람고 3학년 김준영(가명·18)군은 올해 사회·과학 교과 대신 심화예술 교과인 ‘영화의 이해’와 ‘디지털사진촬영’을 듣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수능 시험 과목인 사회와 과학 교과들을 일찌감치 끝냈기 때문이다. 준영이는 “다른 학교들의 경우 수능이 11월인데도 3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배우는 과목이 있어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들었다”며 “2학년 때 일찌감치 시험 범위를 끝내놓고 복습만 하면 되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2 이공계 진학을 희망하는 이 학교 2학년 이솔비(가명·17)양은 이번 학기에 물리Ⅰ과 지구과학Ⅰ을 수강한다. 1학년인 지난해 화학Ⅰ과 생명과학Ⅰ을 수강했었지만, 수능 선택과목을 물리와 지구과학으로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솔비는 “지난해까진 의대와 약대 진학을 염두에 두고 화학과 생명과학을 들었지만 전공 분야를 더 넓히고 싶어 물리와 지구과학을 신청했다”며 “학교가 교육과정을 탄력적으로 열어둬서 가능했다”고 말했다.
준영이와 솔비가 일반적인 고교생들과 달리 조금은 특별한 방식으로 수업을 듣고 있는 것은 이 학교가 도입한 ‘무학년제(無學年制·non-graded system)’ 때문에 가능했다. 서울 목동에 있는 자율형 사립고 한가람고는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교육과정의 장벽을 없애고 자신에게 맞는 과정을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무학년제를 운영하고 있다. 고교 2학년생과 3학년생이 수준에 따라 같은 수업을 듣거나 2학년 학생이 3학년 과정을 앞당겨 듣는 광경이 이 학교에선 더 이상 낯선 장면이 아니다. 1학년 때 듣지 못했던 과목을 2학년이나 3학년 때 듣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학년 별로 경직된 교육과정 때문에 수박 겉핥기식 ‘속진(速進)학습’이 이뤄지고, 이것이 학원이나 과외 등 또 다른 선행학습을 부르는 일반고의 모습과는 대비되는 점이다.
◇한 학년에 시간표가 100가지나 되는 학교=지난 1일 오후 찾은 한가람고 3층 영어교과 교실에서는 2학년 학생 14명과 3학년 학생 2명이 함께 앉아 있었다. 수업 과목은 ‘심화영어작문’. 100% 영어로 진행되는 심화영어작문은 이 학교의 대표적인 무학년제 과목이다. 수능 영어교과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2학년과 3학년 중 16명의 학생이 수강신청을 해 수업이 구성됐다.
한가람고 백성호 교장은 “영어를 아주 잘하는 아이들에겐 수능 체제에 맞춰진 일반 영어시간도 고역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영어나 수학 등의 과목은 학생의 학습수준이 고교 입학 전부터 현저하게 차이가 벌어져 있어 한 교실에서 같은 교재로, 동일한 방법의 평가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백 교장은 “학년별로 일률적으로 가르치기보다는 같은 교과 영역 내에서 학생 수준에 맞는 이수 경로를 선택할 수 있다”며 “학생 스스로 보통-심화 교과를 연계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한가람고는 학년별 교육과정을 터놓으면서 동시에 학생들이 수강할 수 있는 과목의 선택권도 대폭 넓혔다. 특히 사회 교과 같은 경우는 수능 선택과목에 포함된 10과목(한국사·생활과 윤리·동아시아사·한국지리·사회문화·윤리와 사상·세계사·세계지리·법과 정치·경제)을 모두 개설했다. 과학의 경우는 깊이를 넓혔다. 물리Ⅰ·Ⅱ와 화학Ⅰ·Ⅱ, 생명과학Ⅰ·Ⅱ, 지구과학Ⅰ·Ⅱ 외에 고급물리·고급화학·고급생명과학·고급지구과학 등의 과목을 열어 과학고 내지 대학과정의 심화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수강 과목이 다양해지면서 270명 정도인 이 학교 한 학년 학생들의 수업 시간표는 100가지나 된다. 학교가 교육과정을 탄력적으로 운영하고, 학생들이 그 과정을 자신의 학습계획에 맞게 활용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지난해 7월 전교생 830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무기명 설문조사에서도 다양한 과목 개설의 효과는 드러났다. ‘내가 배우고 싶어 하는 다양한 과목이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돼 있다’는 항목에 대해 306명이 ‘매우 긍정’, 290명이 ‘긍정’이라고 대답해 전교생의 약 72% 정도가 만족감을 나타냈다.
◇‘성취평가제’ 정착 등은 과제=현재 무학년제는 한가람고 외에도 전국 단위 자율형 사립고(옛 자립형 사립고)인 하나고 등 2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자율형 사립고가 가진 교육과정 운영의 탄력성과 일반고에 비해 상대적으로 넉넉한 교사 수급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들 고교의 경우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 한 명의 교사가 두 과목 이상을 가르치기도 한다. 영어심화 과목이나 심화예술 교과 등 전문성이 요구되는 과목에서 외부 강사를 채용한다.
교육현장에 ‘성취평가제’가 완전히 자리 잡지 않은 것도 무학년제 도입이 망설여지는 이유 중 하나다. 내신 성적을 9등급으로 상대평가하는 방식이 아닌, A-B-C-D-E 등급으로 절대평가하는 ‘성취평가제’는 현재 고1에 적용되고 있다. 한가람고에서는 지금까지 무학년제를 실시하면서도, 평가방식에선 학년별로 평가하는 기존 교육과정을 벗어나지 않았다. 즉, 같은 물리Ⅰ을 듣는다고 해도 1학년은 1학년끼리, 3학년은 3학년끼리 별도로 평가하는 방식을 유지해온 것이다. 백 교장은 “현 3학년은 집중이수제(특정 과목을 한 학기에 몰아서 학습하는 방식), 2학년은 선택과목 연간 운영, 1학년은 성취평가제를 따르고 있는 특성 때문에 3개 학년이 별도의 평가방식을 운영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현 고1과 현 중3이 동시에 성취평가제를 적용받는 내년부터는 얘기가 달라진다. 또 올해부터 ‘고등학교 학업성적관리 시행지침’이 새로 도입되면서 학년을 통합한 평가가 불가피해졌다. 물리Ⅰ을 듣는 학생이 1학년 50명, 2학년 50명, 3학년 50명이라면 학년 구분 없이 150명 모두를 같은 기준선상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얘기다. 학부모들 사이에서 “고학년생들이 많이 듣는 과목에 저학년생들이 참여하면 저학생년생들이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그럴 경우 학년에 따라 기피 과목이 생길 수 있고, 결국 학년별로 선택하는 과목이 나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대학들이 2018학년도까지 신입생 선발에 성취평가제를 유예하고 있는 점도 무학년제 정착에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백 교장은 “같은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에 대해 함께 평가하는 게 무학년제의 본래 취지에는 맞지만, 학년별 발달과정의 차이가 있고 대학들이 내신 상대평가 9등급을 요구하는 현 체제에서 그렇게 평가하면 학생·학부모의 동의를 얻기 어렵다”고 말했다. 백 교장은 “무학년제가 제대로 정착되기 위해선 실질적 의미의 성취평가제가 정착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수현 기자 siemp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