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임순 (8) 1978년 애광원 ‘장애아동 보호시설’로 새 출발

입력 2014-04-07 02:04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들이 하나둘 애광원을 떠나기 시작했다. 양부모를 만나 새 가정으로 간 아이들도 있고, 어느새 대학을 졸업해 자리를 잡은 아이들도 생겼다. 1960년대 200명을 웃돌던 아이들이 차츰 줄면서 1977년에는 60명 정도만 남게 됐다.

애광원을 떠나지 못하는 아이들은 신체 일부에 장애가 있거나 발달장애 등을 가진 아이가 대부분이었다. 혼자 앉거나 걸을 수 없고, 심지어 식사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 지능이 낮아 정상적인 학업 과정을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 보내지도 못했다.

남겨진 아이들을 위해 새로운 결단을 해야만 했다. 결국 우리는 1978년 7월 애광원을 발달장애 등을 겪는 정신지체 장애 아동을 위한 보호시설로 새출발했다. 당시만 해도 정신지체 장애아들은 이른바 정박아라고 모멸적 놀림을 받으며 집에 갇히다시피 사는 경우가 많았다. 애광원이 정신지체 아동을 위한 시설로 바뀌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남 일대에서 아동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정신지체 아동을 돌보는 일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는 것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훨씬 어려웠다. 고열과 함께 발작 증상을 보이는 아이들이 있었고, 갑자기 시설에서 뛰쳐나가 길거리를 헤매는 아이도 있었다. 바지에 소변을 보면서도 어떤 상황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아이도 적지 않았다.

고된 돌봄이었지만 이 아이들 역시 처음 장승포 언덕 위 움막에서 만났던 고아들처럼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이었다. 나는 보모들과 함께 직접 대소변을 받아내며 애광원을 꾸려나갔다. 손가락 근육이 굳어 숟가락을 잡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는 죽이나 밥을 일일이 떠먹여 주었다. 세수조차 할 수 없는 아이들을 안고 목욕을 시키고,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려고 노력했다.

빨랫감도 엄청나게 많아졌다. 툭하면 옷이 더러워졌고 기저귀와 턱받이, 이불은 수시로 빨아야 했다. 이때만 해도 아직 세탁기가 보편화되지 않아서 나와 보모들, 그리고 직원들이 모두 손으로 빨았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장승포 언덕 위에서 만난 고아들을 떠올리며 참아냈다.

약 2년의 시간이 흘러 아이들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할 수 있는 데까지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1980년 초 ‘애광특수학교’를 세웠다. 애광학교는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단순히 수용하고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 일반 교육과 직업교육을 통해 사회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애광학교 개교 당시 애광원에는 모두 79명의 장애아 및 성인 장애인이 보호를 받고 있었다. 이 가운데 14명은 일반 학교에 다녔고, 나머지 아이 가운데 변화의 가능성이 있어 애광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28명이었다. 특수교육을 전공한 선생님들을 모셔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다양한 활동을 하게 했다. 구멍 뚫린 천에 동전과 단추를 넣었다 빼는 동작도 하고, 음악에 박자를 맞추거나 노래를 부르게 하는 음악치료도 시도했다.

교육의 효과는 금방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던 아이가 ‘오줌이야!’라고 큰소리로 말할 수 있게 됐고, 제 힘으로 옷을 입을 수 없던 아이들이 누운 상태로 바지를 입고 상의의 단추를 끼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정신지체 아동에 대한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지금처럼 하는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또 당시 시설도 보잘것없어서 더 좋은 교육을 하고 싶어도 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정리=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