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란 이름의 질병-(2부) 자살 치료 울타리를 넓혀라] 3. 자살은 예방 가능한 사회 문제(일본)
입력 2014-04-04 03:30
요코하마의 기적… ‘자살자 수 2위 도시’ 희망을 보다
“사채 빚이 이미 많아요. 건강보험료를 낼 수가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요.”
2010년 12월 일본 요코하마 쓰루미(鶴見)구청 보험연금과에 허름한 옷차림의 남성이 찾아왔다. 그는 수개월간 건강보험료를 체납해 구청으로부터 여러 번 독촉전화를 받았다. 그는 많은 빚에 시달리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구청에 찾아왔다고 했다.
채무 독촉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를 담당 공무원은 따뜻하게 맞이했다. 파산 절차를 간략히 설명하고 구청에서 운영하는 법률상담소로 안내했다. “빚은 면제가 가능하지만 지금부터 노력해야 합니다. 매우 힘든 일이 될 테니 힘내십시오.” 공무원의 한마디에 남성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사실 자살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신이 저와 우리 가족을 구했습니다”라며 거듭 감사했다.
자살은 사회적 문제다
“자살예방 사업과 무관한 구청 공무원도 자살을 막는 ‘게이트키퍼(Gatekeeper)’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요코하마 정신건강상담센터 시라카와 노리히토 소장은 지난달 25일 찾아간 기자에게 쓰루미구청 사례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게이트키퍼는 자살 위험 대상자를 발견해 전문기관의 치료를 받도록 관리·지원하는 사람을 말한다.
요코하마는 일본에서 오사카에 이어 두 번째로 자살자가 많다. 1996년 400명 수준이던 자살자가 불과 2년 만인 98년 800명을 넘어설 정도로 급증했다. 아시아 외환위기와 불황이 몰고 온 현상이었다. 높은 자살률이 지속되자 요코하마시(市)는 2007년 정부의 ‘제1차 자살예방대책’에 따라 ‘자살 없는 사회 만들기’를 위한 실태 파악에 나섰다. 경찰 통계와 인구동태 통계를 기반으로 인터넷 설문조사와 병원 설문조사도 병행했다.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①자살은 불안과 걱정에서 비롯된다. 요코하마시가 매년 실시하는 시민의식조사에서 98년을 기점으로 자녀교육, 건강, 사고, 재난 등 ‘생활의 불안’을 호소하는 응답이 급증했다. ‘걱정이 없다’는 응답은 97년 50%로 정점을 찍은 뒤 하락을 거듭해 2012년 10%대까지 추락했다. 지난해 자살자 621명의 자살 동기를 조사한 결과 건강에 대한 염려가 가장 많았고 우울증이 뒤를 이었다.
②자살자는 대부분 사전에 신호를 보낸다. 요코하마시가 2010년 9월 16세 이상 시민 6000명을 상대로 벌인 자살 관련 시민의식조사에서 16.1%가 ‘진심으로 자살을 생각해봤다’고 답했다. 그들에게 자살을 포기한 이유를 묻자 28.1%가 ‘타인과 상담해보니 자살 생각이 사라졌다’고 했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 중 상당수는 사전에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며 적절한 상담을 통하면 자살을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③자살은 막을 수 있다. 요코하마 경찰이 지난해 처리한 자살사건 627건을 분석한 결과 93%가 요코하마 시민이었고 이 중 86%는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 인근에서 발견됐다. 자살자 대다수가 거주지 근처에서 자살을 시도한다는 의미다. 요코하마시는 이웃의 작은 관심으로도 자살 위험을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세 가지 사실을 종합하니 이런 결론이 나왔다. ‘자살은 예방할 수 있는 사회적 문제다.’
누구나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사람과 만나 이야기하고 마음을 터놓는다면 소중한 목숨을 지킬 수 있습니다.”
2011년 9월 9일 하야시 후미코 요코하마시장은 직접 거리에서 이렇게 외치며 자살예방 가두 캠페인을 벌였다. 자살자 유가족과 요코하마시 철도회사 6곳의 역장들도 참석했다. 전철역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하야시 시장은 이날 “모두가 주변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손을 맞잡으면 한결 나아집니다. 생명을 지키려면 서로 의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요코하마시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시민 모두가 자살예방에 힘쓰자’는 모토 아래 본격적인 자살예방 캠페인을 시작했다. 지방정부부터 앞장섰다. 모든 공무원에게 자살예방교육을 실시하고 게이트키퍼 양성에 힘써 지난해까지 당초 목표치였던 4000명보다 배 이상 많은 9410명을 배출했다. 쓰루미구청 공무원의 사례는 이런 캠페인이 이뤄낸 성과다.
시민의 경각심을 높이는 데도 주력했다. 정신과 의사, 연예인 등 저명인사를 초청해 시민 대상 자살예방 강연회를 열었다. 2009년에는 자살예방영화제도 개최했다. 수상작은 요코하마 시내 영화관에서 개봉영화 시작 전에 늘 상영했다. 주기적으로 ‘자살대책 강화기간’을 정해 시청·구청·도서관·기차역 등 공공장소에 ‘자살을 막자’ ‘당신도 생명의 문지기입니다’ 같은 포스터를 설치했다.
심지어 매년 성년의 날을 맞은 20세 청년들에게 축하 우편을 보내며 지인이 ‘죽고 싶다’고 털어놓을 때 상담해주는 방법이 적힌 팸플릿을 첨부했다. 시라카와 소장은 “누군가 자살을 생각하거나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이 주변 지인”이라며 “소중한 사람이 ‘죽고 싶다’고 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든 시민이 숙지해야 자살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하철역의 푸른 전등
자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회적 요인’도 제거하기 시작했다. 2009년 지하철역 플랫폼마다 설치한 ‘푸른 전등’이 대표적이다. 푸른빛 아래에서는 자살 시도가 급감한다는 연구 결과를 반영했다. 2000년대 이후 청년층 자살 문제가 대두되자 ‘이지메’ 학생을 위한 전화상담소를 개설하고 다중채무자와 ‘니트족(NEET·취업포기자)’ 자립책도 마련했다.
자살의 직접적·간접적 원인으로 가장 많이 지적되는 알코올 오·남용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요코하마시는 최근 지하철 객차와 역내에 ‘매일 마시면 맛이 가요!’라는 제목의 위트 있는 포스터를 제작해 붙였다. 자살자의 21%가 음주 문제를 겪고 있다는 지난해 국립정신의료연구센터의 조사 결과를 반영한 것이다. 조사 대상자 중 80%가 알코올 의존증을 앓고 있었다. 대부분 잠이 오지 않으면 술을 마시는 습관이 있었으며 자살을 시도할 때 만취 상태였다. 포스터에는 ‘술 없이 잠들지 못한다면 위험신호입니다. 정신건강상담센터로 바로 연락하세요’라는 안내문 외에는 자살과 관련된 문구가 전혀 없다. 절주 캠페인으로 ‘위장’한 자살예방 캠페인인 셈이다.
자살자 유가족을 위한 대책도 마련했다. 2010년 임대주택에서 자살한 남성의 유가족에게 집주인이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일이 불거지면서 자살자 유가족 보호가 전국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요코하마시는 같은 해 ‘자살 대책은 자살 유가족의 인권 문제’라는 판단 아래 시청 건강복지국 직원 인권 교육에 자살 유가족 보호 내용을 포함시켰다. 2012년에는 ‘요코하마시 인권시책기본지침’에 ‘자살대책 관련 시책’을 담았다. 자살 유가족이 필요할 때 전화할 수 있는 상담 핫라인을 설치하고 유가족 대상 심리 부검도 실시했다. 모임도 주선해 ‘산들바람’이란 자살 유족 모임이 만들어졌다.
이런 노력으로 고공행진을 이어가던 자살자 수는 2011년 790여명, 지난해 621명까지 줄었다. 시라카와 소장은 “2006년부터 시작된 요코하마시의 자살예방사업은 최근에야 성과가 나오고 있다”며 “자살예방은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추진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살과 관련된 다른 영역과 협력을 강화해 종합적인 정책을 계속 펴나간다면 ‘자살 없는 요코하마’의 실현도 머지않았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요코하마=글·사진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