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남도영] 국정원의 순진한 해명
입력 2014-04-04 02:42
우리는 북한에 관한한 매우 이중적이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빨갱이를 때려잡자’는 빛나는 별빛 아래 온 국민이 한 방향으로 달려가던 시절은 고민할 필요가 없어 좋았다. 그런 시대는 끝났다. 대통령이 “통일은 대박”이라고 선언한 사이에 서해에서는 남북간 포격전이 벌어지고, 유엔과 우리나라 국회에서 북한 인권법이 논의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북한에 살고 있는 딸이 한국으로 넘어온 탈북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한국) 재판에 나간 일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지만, 현행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에는 북한 주민과 접촉하려면 통일부 장관에게 미리 신고해야 하며, 부득이한 경우 접촉한 후에라도 신고해야 한다는 규정이 존재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북한은 주적이면서도 동포이고, 전쟁광들의 나라이면서도 통일로 하나가 돼야 할 나라이다.
간첩 증거위조 사건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 의해 증거위조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다면, 중국 대사관이 문서 위조를 확인해주지 않았다면, 전형적인 ‘탈북자로 위장한 간첩 사건’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는 다른 사건들처럼 곧바로 잊혀졌을 것이다. 상황은 국가정보원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중국에서 문제될 리 없다”던 국정원 직원의 장담과는 달리 중국은 문제를 제기했다. 검찰 수사를 통해 유우성(34)씨 간첩 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국정원의 공작이 세상에 공개됐다.
증거위조 사건을 접하면서 과거 서슬 시퍼랬던 정보기관이 연상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70·80년대에 일어났음직한 소식을 2014년에 접한 당황스러움과 실망감이 더 컸다. 유씨의 신원은 복잡하다. 북한사람인 동시에 중국인이었고, 탈북자로 입국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사업차 중국을 여러차례 드나들었으며, 어머니 장례를 치르기 위해 북한에도 다녀왔다. 명문 사립대학을 다녔으며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정보기관이 이런 유씨를 ‘활용’하거나 ‘처리’하는 방법이 서울시 공무원 출신 간첩으로 잡아넣고,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증거를 위조하는 것밖에 없었을까.
유씨에 대한 국정원의 일처리는 너무 도식적이고 창의적이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영화를 많이 본 탓인지 이중·삼중 스파이나 대북 밀사, 역공작 같은 게 더 정보기관에 어울렸을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한 달에 200∼300명의 탈북자가 국내로 들어오고, 국내에 있는 탈북자가 2만명을 넘었다. 선량한 탈북자와 극소수 위장 간첩을 구별하기 위한 국정원의 노력을 부인하지 않는다. 대다수 국정원 직원들은 여전히 음지에서, 공개되지 않는 위험 속에서 일하고 있음을 믿고 싶다. 그런 믿음조차 사라진다면, 국민은 항목조차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 국정원 정보비에 세금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이번 사건이 발생한 이후 국정원은 여러 차례 언론보도와 검찰수사에 대한 참고자료를 내놓았다. 대부분 ‘증거위조에 관한 한 우리도 협조자에게 속았다’는 취지다. 중국 국적 정보원의 말만 믿었다는 게 정보기관이 그리 떳떳하게 내놓을만한 해명인지 모르겠다. 전직 국정원장을 지낸 인사는 기자에게 “이번 사건은 법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국정원 운영의 문제”라며 “잘 모르는 사람이 충성심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안타까워했다. 남재준 국정원장은 철저한 국가관과 충성심으로 무장한 무사적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무사가 적과 아가 구별되지 않는 21세기 정보기관 최고수장에 어울리는지 재검토해볼 때가 됐다.
남도영 사회부 차장 dy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