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혜진] 옷장 소탕 대작전

입력 2014-04-04 02:41


어느 날부터인가 자주 입는 옷들이 슬금슬금 옷장 밖으로 쫓겨나기 시작했다. 이미 옷장 안은 포화 상태. 내일도 입을 거라 살짝 걸어둔 한두 벌이, 세 벌 네 벌로 늘어난다. 누가 들으면 옷이 얼마나 많길래,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옷 애호가 축에는 끼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오히려 매일 아침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아 한참을 고민하는 경우가 더 많다.

며칠 전 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두꺼운 겨울 옷 틈에 끼어 있던 봄옷 한 벌을 겨우 찾아내고 진이 빠져버렸다. 빡빡하게 들어찬 옷 사이에서 끄집어내려다 옷걸이가 튕겨져 나와 머리를 강타하기까지 했다. 이러니 옷장 안은 검은 무리들이 점령한 도시의 뒷골목처럼, 선뜻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그런 복잡하고 ‘음침한’ 곳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이 무법천지의 옷장 속을 일망타진하리라 단단히 마음 먹고 문을 활짝 열어젖히니 그야말로 가관이다. 옷장 봉에는 같은 자리를 차지한 옷걸이 서너 개가 겹쳐 있기 일쑤였다. 그나마 우락부락한 덩치의 겨울옷들은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얇은 옷들은 ‘뼈도 못 추린 채’ 간신히 걸려 있었다. 비싼 옷들이 살짝 구겨진 데도 제법 되었다.

일단 정말 안 입을 거 같은 옷부터 한 벌씩 소탕했다. 많이 낡았는데도 옛 정을 생각해 버리지 못한 것, 내가 이걸 정말 돈 주고 샀을까 의심되는 헐렁해진 옷, 유행이라고 한 벌 구입했지만 실제 입은 기억도 없는 옷, 화려하고 예쁘긴 한데 정작 내 스타일은 아닌 옷…. 저마다의 ‘죄목’을 달고 옷들이 사라지자 서서히 옷장 안이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어떤 옷들이 있는지도 한눈에 보였다. 신기하게도 걸려 있던 옷의 가짓수가 줄어들수록 내가 지금 당장이라도 입을 수 있는 옷은 늘어났다. 이 티셔츠랑, 저 치마랑 하며 적적하게 매치가 되었다. 그제야 정말 나에게 잘 어울린다 싶은 좋은 옷들이 찰랑찰랑 제 공간을 가진 채 걸렸다. 아침마다 입을 게 없다며 고민하던 이유가, 정작 옷이 없어서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살아가며 사람이든, 물건이든, 어떤 가치든 나에게 귀하고 소중한 것을 오래도록 잘 간직할 수 있는 첫 번째는 불필요하거나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쌓아두지 않는 것이다. 만약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었다면, 일단 솎아내는 일이 먼저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말 귀한 존재들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정작 우리는 그것을 걸어둘 수 있는 삶의 공간을 가지지 못한 상태일 테니까.

이혜진(해냄출판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