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세 노모가 들려주는 신산한 인생사… ‘야야, 어느 쪽 무가 더 커보이노?’

입력 2014-04-04 02:21


구술 생애사는 한 개인의 출생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체 삶의 경험을 현재화시키는 역사 텍스트이자 구술자의 과거와 현재에 관한 적극적인 자기표현이라는 점에서 역사와 문학이라는 두 범주에 걸쳐 있다.

‘야야, 어느 쪽 무가 더 커보이노?’(도서출판 동산사)는 평생 학교 문턱 한 번 넘지 못했던 79세 노모가 진술하고 아들이 풀어서 정리한 구술 생애사의 전범으로 읽힌다. 책의 구술자는 네 명의 아들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동네에 있는 폐지를 모으려고 새벽 3시에 일어나는 강금선(79)씨, 집필자는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앞에서 20여 년 동안 책방 ‘풀무질’을 운영하고 있는 셋째 아들 은종복(49)씨이다. 종복씨가 어머니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한 것은 2년 전의 일. “오늘부터 내 어머니가 살아 온 얘기를 쓰려 한다. 어머니가 기억을 더듬어 말씀하시면 내가 글로 써 내려간다. (중략) 어머니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인간극장’을 즐겨보시는데 그곳에 나온 사람들보다 당신이 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하신다.”(26∼27쪽)

종복씨는 2012년 10월부터 2013년 11월까지 어머니 집을 찾아가서 어머니가 하는 말을 녹음해 이 글을 썼다. 그 계기는 2012년 8월 아버지 은상기씨의 팔순 잔치를 기념해 짤막한 아버지 이야기를 썼던 경험이 바탕이 됐다. “아버지 고향은 경북 군위군 소보면 화실이다. 지금도 하루에 버스가 네 번쯤 들어가는 산골이다. 어머니 고향은 화실에서 걸어서 1시간 30분쯤 걸리는 새기터다. 두 분은 아버지 누나 소개로 만났고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않고 혼례를 치렀다. 그때가 1953년도로 한국전쟁이 막 휴전했을 때였다.”(19쪽)

운전병으로 복무하던 아버지가 잠시 휴가를 나와 혼인을 치르고 복귀하자 어머니는 화실에서 시부모와 시아주머니, 시동생을 합쳐 20명이 넘는 시댁 식구들의 시집살이를 했다. 무더위가 푹푹 찌는 어느 여름날, 시어머니가 무를 두 개를 뽑아 며느리에게 말한다. “‘야야, 어느 무가 더 커 보이노?’ ‘와요! 어머니 두 개 모도 비슷하고마!’ ‘그래도 잘 좀 봐라, 이 짝 게 좀 더 커 보이지 않나?’ 시어머니는 무 한 개를 대구에 사는 둘째 시아주버니 댁에 주려고 하는데 좀 더 큰 것을 주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 그까짓 무를 가지고 그러세요. 두 개 다 드리지 않고.’ 시어머니는 펄쩍 뛰면서 시아버지가 아시면 난리난다고 했다. 그 말씀을 듣고 어머니는 하루라도 서둘러서 시골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20쪽)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집살이를 뒤로 하고 달랑 쌀 한 말과 차비만 손에 쥐고 상경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파란만장은 이제 어머니의 입을 통해 구술된다. 서울 종암초등학교 앞에서 풀빵 장사를 하던 시절, 휘경동의 상자 만드는 종이공장 다락방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시절, 첫아들을 낳고 광주리장사를 하던 시절, 그리고 종복씨를 낳던 장면 등등. “어머니는 비가 내리는 한밤중에 혼자서 나를 낳았다. 그땐 집에 쌀이 떨어져서 밀가루만 먹고 살았다. 어머니는 마른 이불 하나를 방에 깔고 비를 피해서 나를 낳았다. 어머니 혼자 아기 탯줄을 자르고 씻겼다.”(63쪽)

그 어머니가 오늘도 새벽 3시면 일어나 남들이 버린 종이나 빈 깡통을 주우러 어둔 길을 걸어간다. 그렇게 한달에 60여 만 원을 벌어 저축한 통장을 아들들에게 목돈으로 건넬 만큼 통 큰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우리 주변에 적지 않지만 종복씨처럼 구술자서전으로 쓴 아들을 둔 어머니는 드물다. 발문을 쓴 역사학자 박준성은 “일하는 사람들, 노동자들이 자기 역사를 쓰는 것이 역사를 바꾸는 중요한 힘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렇게 털어놨다. “우리 ‘엄마’는 지금 간암이 폐로 전이까지 된 상태다. 어머니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짬짬이 시골에 가서 어머니 이야기를 듣고 나도 어머니의 역사를 써 보아야겠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