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류시인 시집보냈나”… 오탁번 시인 신작 ‘시집보내다’
입력 2014-04-04 02:20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한 오탁번(71·사진) 시인의 신작 시집 ‘시집보내다’(문학수첩)는 두 개의 물결을 거느린다. 하나는 웃음과 유머를 머금게 하는 유희로서의 물결이고 또 하나는 그 물결 아래에 흐르는 냉철한 자기반성의 흐름이다.
“한 학기에 잘해야/ 예닐곱 번 강의실에 들어오는 지훈이/ 어느 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왜 조지훈인지 알아?/ 학생들이 암말도 안 하면/ 그는 껄걸 웃으면서 말했다/- 조지 훈훈해서 조지훈이야!”(‘지훈유감’ 부분)
선배 시인인 조지훈의 에피소드를 시로 풀어낸 이 장면에서 절로 웃음 짓게 만드는 유머가 읽혀진다. 이 유머는 타자에 대한 관용인 동시에 자칫 침전되기 쉬운 인간관계에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가벼움을 선사한다. 막 출간된 새 시집을 누군가에게 발송했는지, 헷갈리는 장면을 다룬 표제시에서도 그런 유머와 해학이 읽혀진다. “뒤죽박죽이 된 나는 또 중얼거린다/ -김지헌 시집 보냈나?/ -서석화 시집 보냈나?/ -홍정순 시집 보냈나?/ 마침내 이 세상 모든 여류시인이/ 시집을 갔는지 안갔는지 죄다 아리송해지는/ 깊은 가을 해거름/ 내 영혼마저 흐리게 이울고 있다”(‘시집보내다’ 부분)
이런 해학과 유머의 흐름이 그냥 언어적 유희가 아닌 것은 차가운 자기반성이라는 또 하나의 흐름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온탕과 냉탕이 함께 있는 시집이다.
아침에 일어나 휴대전화를 열면서 간밤에 온 ‘부재중 전화’ 메시지를 보고 가까운 친척 형님이 세상을 뜬 거라고 지레 짐작을 한 뒤, 문상을 가게 되면 밀린 원고를 끝내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에 10분 동안 답신도 못하고 망설인 시인은 자신을 이렇게 단죄한다. “아무도 모르게 흘러간/ 적막의 10분 동안,/ 나는 정녕 무엇이었을까,/ 사람 되라고 중학교 보내준/ 그 옛날의 형님 앞에서!/ 보신탕에도 못 낄/ 비루먹은 개새끼 아니었을까”(‘부재중 전화’ 부분)
이 시처럼 인간적인 한계나 약점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오탁번은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낸다. 그것도 스스로를 비루먹은 개새끼에 비유하면서. 여기에 이르면 그가 보여주는 웃음과 유머라는 온탕과 철저한 자기반성이라는 냉탕은 결국 두 흐름이 아니라 올곧이 오탁번식 발성법이라는 하나의 창작방식에 근거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칠순을 넘긴 그는 ‘시인의 말’에 썼다. “되돌아보면 아득하게도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중략) 술래잡기하는 아이처럼 되똥되똥 뛰어가다가 넘어지는 나의 시여. 모두 다 고맙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