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임순 (7) 거제에 전염병 창궐… 장기려 박사 “제가 갈게요”
입력 2014-04-04 02:24
1960년대 말 거제도 장승포 일대에 갑작스러운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한 달 사이 2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섬 전체에 죽음의 공포가 드리웠고 주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나는 전염병에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현실에 너무나 속이 상했다. 애광영아원을 처음 시작했을 때 부산의 병원에 데려가던 중 배 안에서 세상을 떠난 홍역 앓던 아기가 생각나 더욱 마음이 아렸다. 거제도에서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한 지 15년이 넘었는데 거제도에는 아직도 병원 한 곳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부산복음병원의 장기려 박사에게 전화했다. 장 박사는 아기들이 홍역을 앓던 시절 알게 된 분으로 이후에도 많은 도움을 주셨다.
“장 박사님, 장승포에서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있어요.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한 동네에서 개 열 마리가 한번에 죽어도 난리가 날 텐데, 여긴 섬이라 누구도 관심이 없어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수화기 너머 울음 섞인 목소리를 듣고 있던 장 박사는 “내가 곧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거제도로 달려온 장 박사와 의료진은 전염병이 여름철 조개에 생기는 독성 물질에서 기인한 식중독이라고 설명했다. 장 박사는 이후 토요일마다 애광원에서 밤새 환자를 진료하고 주일에 부산으로 돌아가곤 했다. 부산과 거제도를 오가며 혼신을 다해 치료하는 장 박사의 모습에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장 박사는 전염병이 물러간 뒤에도 4년 동안 주말마다 애광원에서 섬 주민들을 무료로 진료했다. 하지만 주말 진료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섬에서 고생하는 장 박사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든 장소를 마련해 보겠으니 병원을 한번 세워보자고 제안했다. 장 박사도 흔쾌히 동의하고, 병원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구들을 구해 주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1971년 ‘거제기독병원’이 문을 열었다.
거제기독병원은 내과와 외과, 산부인과, 안과, 피부과, 치과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한 진료가 가능했다. 부산복음병원을 비롯한 여러 후원기관의 도움으로 수술실까지 갖췄다. 지역 학교 학생들에 대한 종합건강진단을 실시하고 장승포 주민 385가구에 대한 가정보건기록부를 작성하는 등 지역사회를 섬겼다.
지역사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했지만 병원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가난한 섬 주민들이 병원비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료실 앞에서 이렇게 좋아하는 주민들을 놔두고 돈 때문에 병원 문을 닫을 수 없었다. 거제기독병원은 거제도에 종합병원이 세워질 때까지 7년간 섬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졌다.
1970년대 거제도의 청소년 중에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아이들이 많았다.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환경의 아이들이 불쌍해 1970년 2월 거제도 내륙의 오지 구천리 골짜기에 ‘애광기술학교’를 세워 중등 교과과정과 기술을 무료로 가르쳤다. 애광기술학교는 중학교 의무교육이 시작된 1975년까지 운영됐고, 20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거제도에는 어려운 경제여건 때문에 부부가 함께 농사를 짓거나 갯가에서 일해야 하는 농어민이 많았다. 이들이 낮 시간에 자녀를 맡길 곳이 없어서 속만 태우는 모습을 자주 봤다. 일을 해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자녀 때문에 마음껏 일할 수 없는 환경이 야속해서 속이 상했다. 결국 거제도 애광원은 1970년 3월 장승포 능포리에 ‘애광탁아소’를 세웠다. 주민들이 ‘능포어린이집’이라고 불렀던 탁아소에서는 농어민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도록 아침부터 오후까지 무료로 아기들을 돌봤다.
정리=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