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박강섭] ‘불편한 진실’ 현실화되나
입력 2014-04-03 02:49
지구 온난화를 다룬 영화 중에 ‘불편한 진실’이 있다. 환경운동가이자 미국 부통령을 지낸 앨 고어가 지구 온난화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사람들에게 지구를 구하기 위한 실천을 촉구하고 나선 다큐멘터리 영화다. 고어는 이 영화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더웠던 열 번의 해를 꼽으면 모두 최근 14년 사이에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재해는 더 이상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 주변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경고했다.
서울 여의도 벚꽃이 사나흘도 아닌 보름이나 일찍 피어 충격을 주고 있다. 3월 하순에 영상 20도를 웃도는 초여름 날씨가 며칠 동안 계속되자 벚나무가 서둘러 꽃망울을 터뜨린 것이다.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에서 벚꽃이 가장 먼저 핀다는 경남 진해와 비슷한 시기에 여의도 벚꽃이 만개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3월 중순까지 강원도 산간에 폭설이 쏟아지던 이상저온 현상이 갑자기 이상고온으로 바뀌면서 기온에 민감한 꽃들이 계절감각을 잃어버린 탓이다.
자연에는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다. 동백꽃 다음으로 매화가 피고, 이어 산수유꽃이 샛노란 꽃망울을 터뜨린다. 매화 꽃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릴 때쯤 벚꽃이 피고 비슷한 시기에 진달래와 개나리가 울긋불긋 산하를 채색한다. 섬진강을 끼고 있어 ‘봄의 길목’으로 불리는 전남 광양과 구례, 그리고 경남 하동에서는 이 자연의 섭리가 오랫동안 반복돼 왔다.
그런데 10여년 전부터 이 자연의 질서가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매화가 예년보다 1주일이나 일찍 피거나 늦게 피는 현상이 연례행사가 되면서 지자체는 개화(開花) 시기 예측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축제 시기와 개화 시기가 어긋나 상춘객들로부터 욕을 얻어먹는 일도 다반사가 되었다. 어떤 지자체는 벚꽃이 너무 일찍 피자 벚나무 밑동에 얼음덩어리를 쌓아두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상춘객들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산수유꽃 축제로 유명한 구례에서는 올해 축제 시기를 앞당기는 중대 결정을 내렸다. 산수유꽃이 매화보다 1주일 정도 늦게 피기 때문에 해마다 구례 산수유꽃 축제는 광양의 매화 축제보다 한 주 늦게 시작했다. 그러나 올해는 관례를 깨고 예년보다 1주일 앞당겨 같은 시기에 개최했다. 지구 온난화로 매화와 산수유꽃이 동시에 피고 지는 이상현상을 현실에 반영한 조치다. 앞으로 이런 사례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생태계의 혼란은 관광산업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봄꽃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들은 올해 매화 개화 시기와 지자체 축제 일정이 어긋나 매출이 전년 대비 50% 정도 줄었다고 울상을 지었다. 봄꽃 여행 상품이 봄 매출의 60%를 차지하는 여행업계로서는 막대한 손실이다.
벚꽃 조기 개화로 인한 여행업계의 피해는 더욱 클 것으로 예상된다. 진해에서 하동을 거쳐 서울에서 벚꽃이 피기까지 보름 남짓한 간격이 있었으나 올해에는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벚꽃이 피는 바람에 여행 상품을 판매할 기간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 여의도 벚꽃 축제의 경우 당초 13일에서 3일로 부랴부랴 앞당겼으나 보름 일찍 핀 벚꽃은 벌써 꽃잎이 지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생태계 변화는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사과 재배의 북방한계선은 휴전선 인근의 강원도 양구까지 올라왔고, 비록 온실 속이지만 강릉에서는 커피나무도 재배되고 있다. 동해안에서는 동남아에서 올라온 형형색색의 열대어가 잡히기도 한다. 환경 전문가들은 이런 추세라면 한민족의 표상인 소나무가 한반도에서 사라질 날도 멀지 않았다고 예측한다.
고어의 경고대로 춘삼월 중순까지 계속된 강원도의 폭설과 보름 일찍 핀 여의도 벚꽃이 바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후 변화의 재해 전조가 아닐까. 한반도의 온난화는 생태계는 물론 사계절이 매력 상품인 우리나라 관광산업에도 큰 변수로 등장할 전망이다.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