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홍성화] ‘애니깽’의 꿈을 되새기며

입력 2014-04-03 02:35


1905년 4월 4일 제물포항을 떠난 1033명의 우리 선조들은 영국 일포드호에 몸을 싣고 이름조차 생소한 이역만리 묵서가국(墨西可國)에 와 뜨거운 태양 아래 ‘애니깽(Henequen)’ 선인장의 따가운 가시에 찔리며 노역을 했던 아픈 이민역사를 시작했다. 109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에게 묵서가국으로 알려진 멕시코에는 3만여명의 애니깽 후손과 1만여명의 한인이 살고 있다. 한 해 수만명의 한국인이 관광 비즈니스 유학 등으로 멕시코를 찾고, 우리 기업 1600여곳이 북중미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삼아 비즈니스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가전, 철강, 자동차 부품, 전력, 가스, 광산, 봉제 등 우리 기업의 진출 분야도 다양하며 우리 기업이 필요로 하는 원자재 수입도 증가해 한국은 멕시코의 여섯 번째 교역국가로 자리하고 있다. 우리 기업의 진출이 증가하면서 통상 문제부터 세금 문제에 이르기까지 기업의 애로사항도 끊임없이 발생해 공관에 도움을 요청하곤 한다.

우리나라 철강회사인 A사는 2008년 멕시코 알타미라에 자동차에 주로 사용되는 아연도금강판 생산공장을 세우고 제2공장을 증설해 사업을 확장하려는 와중에 멕시코 정부가 2012년 10월 아연강판 소재인 한국산 수입 철강에 대해 반덤핑 조사 개시를 발표했다. 이후 진행된 예비판정에서 A사는 60.4%라는 높은 잠정 관세를 부과 받고 제2공장의 준공은 물론 기존 공장 운영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필자는 멕시코 경제부, 무역위원 등 고위 인사를 차례로 만나 양국의 교역·투자 관계와 A사의 멕시코 자동차 산업에 대한 기여도를 부각시키며 공정한 판정을 촉구했다. 멕시코 무역위원회와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 덤핑과 관련된 기술적인 문제를 심도 있게 설명하고, 지난해 5월에는 무역구제 서울국제포럼에 멕시코 무역위원회 고위 인사의 한국 방문을 실현시키는 등 A사와 공조해 적극 대응했다.

결국 A사는 최종 판정에서 높은 예비판정 관세율 대신 수입 물량 조절을 통한 조사유예 결정을 받아 안정적인 철강재 수입물량을 확보하게 됐으며, 올해 제2공장 준공식을 열고 연간 90만t의 강판을 차질 없이 생산하고 있다.

멕시코 남부 바하캘리포니아주에는 현지 주사업자의 자금 압박으로 중단 위기에 있던 동광 사업을 우리 기업이 인수해 직접 뛰어든 볼레오동광이 있다. 어느 날 멕시코 세무 당국이 수개월간 중단된 동광 사업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볼레오동광에 9400만 달러의 관세와 추징금을 부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필자는 볼레오동광 관계자와 함께 멕시코 국세청 고위 인사를 접촉했다. 그리고 세금 추징 원인이 이전 사업자의 관리부실로 인한 서류 미비로 발생된 만큼 우리 기업과 직접 관련이 없음을 설명하고, 사업 정상화에 힘쓰는 우리 기업에 피해를 주는 일이 없도록 세무 당국의 선처를 호소했다.

그 결과 멕시코 세무 당국은 우선 원산지 증명 미비를 이유로 볼레오동광에 부과했던 8700만 달러의 관세와 추징 세액을 철회하기로 결정하고 나머지 세액에 대해서는 징수 여부를 검토하기로 했다.

멕시코는 에너지 개혁을 단행해 70여년간 정부가 독점하던 에너지 시장을 개방하고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 대규모 인프라 사업을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하고 있어 석유개발 투자, 정유시설 현대화, 해양플랜트 및 기자재 수출, 발전운영 사업 등 에너지 분야와 교통인프라 분야에서 우리 기업의 멕시코 진출이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100여년 전 기울어가던 국운에 울분하며 멕시코에서 채 이루지 못한 애니깽 선조들의 꿈을 우리 기업인들과 공관이 힘을 모아 다시금 꽃 피울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홍성화 주멕시코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