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임순 (6) 외동딸도 고아들과 함께… 初校 때야 친부모임 알려

입력 2014-04-03 02:05


애광원에서는 아이들을 나이에 따라 나비반 참새반 종달새반 등 여러 반으로 나누어 키웠다. 전쟁과 가난으로 많은 아픔을 가진 아이들이었지만, 아이들은 서로 잘 어울렸다. 노래와 춤도 배우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염소도 기르고 나물도 뜯으면서 씩씩하게 자라났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 나는 배고픈 아이들이 굶거나 아픈 아이들이 제때 치료를 못 받을까 늘 노심초사 가슴 졸이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도 아이들이 해맑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얼굴 가득 웃음을 짓곤 했다.

나는 하나밖에 없는 딸 우정이를 애광원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키웠다. 피란 생활 때는 시어머니께서 우정이를 키워주셨지만, 전쟁이 끝나 서울로 돌아가시면서 다시 내 품으로 돌아왔다. 딸에게는 내가 친엄마라는 사실을 굳이 알리지 않았다. 내게는 우정이나 애광원의 다른 아이들 모두 다 같은 자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엄마가 누군지도 모르며 성장하고 있는 딸을 볼 때면 가끔 가슴이 아려오곤 했다.

내가 친엄마라는 사실을 알린 것은 우정이가 초등학교 5∼6학년에 다닐 무렵이었다. 딸은 그때까지도 어른들 농담처럼 자신을 ‘영도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로 알았다고 한다. 우정이는 어른이 된 뒤 “어렸을 때, 엄마가 유독 내게는 신경을 덜 쓰셔서 왜 그럴까 고민하곤 했다”면서 “친딸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조심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애광원은 더 좁아졌다. 무엇보다 숙소가 협소해졌다. 1956년부터 새 숙소를 짓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3년 만에 새로운 숙소 3동을 완공했다. 전보다 정돈된 환경에서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돼 마음의 짐을 한결 덜었다. 숙소에 따뜻한 물이 나오는 목욕실까지 갖춰 애광원도 어엿한 복지시설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외국 구호 기관에서도 계속 구호물자를 보내왔다. 애광원의 소식을 듣고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보내주는 개인 후원자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포로수용소가 철거될 때 나온 나무 기둥과 벽돌 등 건축자재를 얻어 2층 강당도 지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서 강당이 비어 있을 때가 많아졌다. 힘들게 지은 강당이 한낮에 비어 있는 것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결혼식장이 필요한 섬 주민들에게 강당을 무료로 빌려 주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라 거제도 주민들의 살림살이는 매우 어려웠다. 작은 배로 물고기를 잡거나 부족한 땅에 소규모 농사를 짓는 게 대부분이었다. 시간이 가도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민들이 농업과 어업 이외의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기술 교육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강당 한쪽에 작업장을 꾸몄다. 이곳에서 주민들에게 옷을 만드는 기술과 기계로 털옷을 짜는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애광원에서 직업교육을 한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다. 직업교육을 받으려 사람들이 몰려와 강당 한쪽에 마련된 작업장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해군에 도움을 요청했다. 해군 측에서는 흔쾌히 설계에서부터 건축에 이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59년 드디어 섬 안에 2층 규모의 ‘직업보도관’을 세웠다. 직업보도관에서는 전쟁으로 가장을 잃은 부인들과 애광원에서 성장한 아이들, 영남 지역의 청년들이 ‘일인일기(一人一技) 습득’이라는 목표 아래 다양한 직업기술을 익혀 사회에 진출했다.

15년간 직업보도관에서 2500명이 넘는 이들이 교육을 받았다. 전쟁의 폐허에서 도움을 받기만 하던 애광원이 드디어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주는 기관이 됐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정리=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