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강은교] 문턱
입력 2014-04-02 02:48
“요샌 방이 방 같질 않아.” “왜요?” “전부 마루바닥이지, 문턱도 없지….”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우리들의 집에서 문턱이 사라지고 있다. 특히 아파트의 경우에는, 아예 문턱이란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우리집이라는, 말하자면 영역표시인 대문과 바깥을 확연히 갈라주던 그것. 대문 안에 들어서면 내 것들로 둘러싸인 나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안도의 한숨이 몰려오게 하던 그것, 방의 문턱도 그렇다.
옛날 집들은 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문턱 때문에 방으로 들어오려는 자는 잠시 문과 싱갱이해야 했다. 문턱을 없애자 그런 불편한 문제는 일시에 해결되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방문자에게 문턱을 넘어서느라, 잠시 호흡을 가다듬게 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방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내방객을 맞을 준비를 할 시간을 주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마치 우리 한옥의 댓돌이 잠시 방문객으로 하여금 숨을 가다듬게 했던 것처럼. 아무튼 방으로 들어오려면 잠시 그것을 건너야 했던, 방과 마루가 확연히 구분되게 하던 그것, 그것이 언제부턴가 사라지고 있다. 말하자면 아파트에 들어서면 우리는 그 집의 나신(裸身)과 곧장 부딪히게 된다. 좀 괜찮은 아파트에는 이럭저럭 중문이라는 것을 만들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서민 아파트는 현관문을 열면 바로 그 집의 모든 것과 부딪히게 된다. 그것은 마치 떼어버려도 괜찮다고 생각되던 맹장처럼 이제 집이란 몸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조선조 고택을 보러 갔다가 고택 대문의 문턱에 걸려 넘어졌다. 바닥이 매끈한 아파트에만 익숙하던 내 발이 딴 데를 보는 순간 거기 걸린 것이다. 넘어지면서 또 문턱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급함을. 왜 잠시 그 높은 문턱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았을까, 하고. 원래 우리의 생활 속에는 ‘한숨 돌리게’하는 것들이 많았다. 말하자면 ‘한 박자 늦게’ 가게 하는 장치들이었다고 할까. 보다 거창하게 말하면 숨 가쁘게 우리를 압박하는 삶을 사는 전략이었다, 고 할는지.
어느새 우리는 너무 급해졌다. 우리가 원래 이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미덕이 아니라고 여겨진 때부터(아마 일제 식민지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는 잠시 숨을 가다듬는 것을 악덕시했다고 해야 하리라. 재빠르지 못한 소치로. 잠시잠시 숨을 돌리자. 한 박자 늦게 가자. 문턱의 노래가 들려온다. ‘나는 삶의 지혜예요. 잠시 나의 몸 위에서 숨을 가다듬으세요.’
강은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