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임순 (5) 전쟁고아들에 보내주신 주님의 선물 ‘케어미션’

입력 2014-04-02 02:31


전쟁 직후 남쪽의 섬에는 신문이나 텔레비전 등 미디어의 혜택이 전혀 없었다. 당연히 전쟁고아들을 돕는 외국의 구호기관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아이들에게 먹일 식량을 나눠달라며 애원하고 다녔다. 정부나 공공기관에 아이들을 도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느라 밤을 지새운 적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아주머니, 저희 아기들 먹일 밀가루가 필요한데, 있으면 조금 나눠 주세요.”

“읍장님, 구호 양식 남은 것 조금 없을까요? 아기들이 배고파 우는데 먹일 것이 없어서요.”

태어나 이태까지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나 내 가족이 아닌 생면부지의 생명들을 위해 이렇게 뛰어다니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구걸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비참하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생명을 돌보는 일에 체면이나 자존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외국 사람들이 애광원을 찾아왔다. 그들은 미국의 ‘케어미션(Care Mission)’이라는 구호기관에서 왔다고 했다.

“원장님, 우리는 한국의 피난민을 돕기 위해 파견돼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거제도 사무소에 갔더니 언덕 위에 아이들을 키우는 영아원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를 만난 것 같았다.

애광원의 상황을 살펴보고 간 케어미션은 쌀과 고기, 설탕과 초콜릿, 과자 등 먹을거리를 잔뜩 보내왔다. 하루하루 아기들을 먹일 밀가루 죽을 마련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했는지 눈앞의 구호식량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나는 케어미션을 통해 우리 같은 피난민이나 전쟁고아를 돕는 구호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정부나 공공기관 외에도 외국의 구호기관을 수소문해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세계기독교봉사회, 영연방아동구호재단, 미국양친회 같은 곳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음식만이 아니라 헌옷과 담요 등 아이들을 돌보는 데 꼭 필요한 구호물자도 속속 도착했다.

케어미션이나 세계기독교봉사회 등의 외국 구호기관이 보낸 구호물자를 받으려면 부산까지 배를 타고 가야 했다. 하루는 물건을 받아 장승포행 배로 옮겨 싣는데, 원래 받기로 했던 것보다 여섯 상자가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됐다. 망설임 없이 손수레를 돌려 케어미션 본부로 돌아갔다. 쌀 한 톨이 아쉬운 입장이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일한다면서 양심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케어미션 본부로 돌아가자 창고를 지키던 경비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아주머니, 더 줄 건 없어요. 돌아가세요.”

경비원은 내가 구호물자를 더 받기 위해 돌아온 줄로 알았던 것 같다.

“아니에요, 아저씨. 배에 짐을 실으려다 보니 우리가 받기로 했던 것보다 여섯 상자나 더 받았다는 걸 알게 돼서요. 그래서 돌려드리려고 왔어요.”

“아, 그래요? 미안하게 됐군요.”

이 일이 있은 후 케어미션은 다른 기관보다 애광원에 조금 더 많은 구호물자를 배정해 주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케어미션 직원들이 애광원의 정직함에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그저 기독교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직함을 보상해 주셨던 것 같다.

막막하기만 했던 전쟁터에서 하나님은 내게 귀한 생명을 맡겨 주셨고, 또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사람들과 기관을 통해 아이들을 보살필 수 있게 하셨다. 아기들이 점점 자라면서 1959년 나는 애광영아원의 이름을 ‘거제도 애광원’으로 바꾸고 갓난아기부터 국민(초등)학생에 이르는 아이들을 함께 키웠다.

정리=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