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김일수] 청계천에서 매화를 만나다

입력 2014-04-01 02:48


“절개 흠모했던 선인들… ‘황제노역’ 연출한 법률가들은 짠맛 잃은 소금과 같다”

얼마 전 고마운 분으로부터 봄소식이 날아 왔다. 남도엔 매화가 한창이라는 소식과 함께 왜 사군자 중 매화인지를 간결하게 덧붙였다. 추위가 매울수록 매화는 더 맑은 향기를 피우고, 사람은 어려움을 겪을수록 그 절개가 더 드러나는 법이란다. 올봄 들어 처음 맞는 꽃샘추위였지만 청계천 매화거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1킬로미터 남짓 줄지어 늘어선 매화나무엔 송이송이마다 생명의 봄기운이 감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연분홍빛 속살을 드러낸 꽃망울은 손에 꼽힐 만큼 아직 드물었다.

먼저 꽃이 피어야 뒤이어 향기도 퍼지는 법. 그런데 왜 같은 환경 속에 살면서 어느 매화송이는 벌써 눈을 떴는데, 다른 매화송이들은 아직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꽃샘바람 속에 묻어나는 작은 봄 햇살, 그 온기를 저들은 긍정의 마음으로 받아들인 반면 이들은 아직도 부정의 빗장을 걸고 손사래를 치는 탓이 아닐까. 저들은 차가운 현실 너머에 있는 따스한 미래의 지평을 향해 팔을 벌리고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디딘 반면 이들은 풀리지 않는 냉엄한 현실의 벽에 스스로 갇혀 시비와 불평의 포로가 된 때문은 아닐까.

긍정의 하늘과 열린 희망의 땅은 포용과 조화, 상생과 통합의 지평을 잉태하는 반면 부정의 먹구름과 불만의 사막은 선별과 배제, 단절과 고립의 회오리바람을 몰고 온다. 저기에는 건설적인 사랑과 생명의 향기가 움트고, 여기에는 절망적인 침묵과 파괴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 같은 자연의 섭리는 인간의 공동체적 삶 구석구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곁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각종 시위와 정치적 행태들이 그렇다. 한때 정의와 형평이라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들의 놀이마당이라고 칭송되던 촛불시위광장, 그 이면의 진실이 그랬다. 정의구현을 표방하는 일부 사제들의 절제되지 못한 난폭언어의 제례형식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더 하나, 선거철만 되면 고질병처럼 도지는 것, 이름도 간판도 갈아 치우고, 색깔도 바꾸어 버리고, 하루아침의 안개처럼 이합집산하는 정치세력들도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증오를 부추기고, 이쪽이냐 저쪽이냐의 편 가르기로 국론을 몰아넣어 분열을 조장한다. 숙의와 경청, 대화와 대타협의 예술적 경지의 정치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시 매화 곁으로 가보자. 옛 사람들이 매화향기에 잇대어 흠모해 마지않았던 절개가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혹자는 정조대(貞操帶)처럼 시대에 뒤진 유물이라고 치부할지 모른다. 하지만 ‘일당 5억원 황제노역’을 연출한 일단의 법률가들이 지역정서에 휘말린 채, 그것도 지역의 특수사정을 헤아려 합법적으로 내린 판단이라고 강변할 때, ‘너 매화향기가 전해 주는 절개가 무엇인지 들어 보았느냐’고 들이댈 정신적 경고음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

17세기 계몽철학자 라이프니츠는 로마법의 학설휘찬에 나오는 ‘정직하게 살라’는 법원칙을 최고의 보편적 정의라 지칭한 바 있다. 그는 정직이 행복으로 이끄는 통로라는 인식 아래 이를 경건(pietas)과 동일시했다. 자기유익을 좇는 굴레에서 벗어나 남의 행복을 도모하는 현자의 정직한 삶은 영혼과 신의 불멸을 전제한다면 바로 경건한 삶 그 자체라는 것이다.

성직자들이 성의(聖衣)를 두르듯, 법조인도 재판에 임할 때 편견과 독선을 멀리하기 위해 법복을 입는다. 이 두 종류의 상징물은 각각의 직무가 갖고 있는 거룩성과 경건성의 표현 외에 다름 아니다. 그 상징물 뒤에 숨어 위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사적인 관점에서 그것도 세속적인 탐욕을 채우는 데 오용한다면 그것은 결코 정직 내지 경건하게 사는 자세가 아니다. 매화향기가 은근히 암시하는 절개란 바로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속된 것을 속되게 구별할 줄 아는 마음이다. 그것은 생명과 영혼을 길이 보전하는 길이기도 하다. 양심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넘기는 법률가는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과도 같다.

김일수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