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명희] 유언의 날
입력 2014-04-01 02:49
재위 12년 동안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방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천하를 호령했던 알렉산더 대왕은 33세에 열병으로 죽으면서 “내가 죽거든 손을 관 밖으로 꺼내 달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천하를 손에 쥐었던 사람도 죽을 때는 결국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나보다.
프란츠 카프카는 임종을 앞두고 작품과 일기, 편지 등 자신이 남긴 모든 글을 불태워 달라고 유언했다. 하지만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가 그의 글들을 출판해 빛을 보게 됐다. 마거릿 미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단 한 권의 책을 쓴 작가로 추앙받기 위해 이전에 썼던 모든 작품을 스스로 없애고 자신이 죽은 뒤 발견되는 작품도 모두 없애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의 유언장은 그가 살아온 삶만큼 숭고하다. “신과 영혼, 책임감. 이 세 가지 사상만 있으면 충분하다. 적어도 내겐 충분했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 왔고 그 속에서 죽을 것이다. 진리와 광명, 정의, 양심, 그것이 바로 신이다. 가난한 사람들 앞으로 4만 프랑의 돈을 남긴다. 극빈자들의 관 만드는 재료를 사는 데 쓰이길 바란다. 내 육신의 눈은 감길 것이나 영혼의 눈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을 것이다 ….” 2년 뒤 그는 유언장을 더 짧게 고쳐 쓰고 8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구상 시인은 2004년 작고하기 전 쓴 가상 유언장에서 “오늘이 영원 속의 한 표현이고, 한 과정일 뿐”이라며 “오늘에서부터 영원을 살자”는 글을 남겼다. 지난해 9월 세상을 떠난 작가 최인호는 “주님이 오셨다. 이제 됐다”는 마지막 말을 했다.
유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진실이라고들 한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두려움과 끝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재벌들은 유언 때문에 송사를 벌이기도 하지만 다 내려놓고 가야 하는 죽음 앞에선 누구나 숭고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언을 남길 겨를도 없이 병원 중환자실이나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과 이별하는 이도 많다.
하이패밀리(옛 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가 사순절 기간인 오늘을 ‘유언의 날’로 제정하자며 발기인 대회를 갖는다. 유언 때문에 가족 간 갈등이 일어나고 가족해체 위기를 겪는 현실에서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고 좋은 떠남을 준비하는 계기를 만들자는 취지라고 한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크리스천이 아니더라도 유언을 준비한다면 남은 삶을 더 의미 있게 살아가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