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형 칼럼] ‘사역이란 이름의 중독’ 에 빠진 ‘우연한 바리새인들’
입력 2014-04-01 02:13
“요즘 정말 행복하게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날아갈 것 같습니다.”
오랜 기간 서울의 대형 교회에 출석하다 얼마 전 새로 개척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A씨의 말이다. 대형 교회 성도 시절, A씨는 교회 내 대부분 사역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열성적인 신자였다. 사역은 사역을 낳게 되어 A씨의 일주일 삶은 온전히 교회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기쁨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사역의 기쁨은 줄어들고, 의무감과 관계성에 의해 사역을 ‘치러내는’ 자신을 발견했다. 생각해보니 사역이란 이름 하에 잃어버린 가치도 적지 않았다. ‘주의 일’이 아니라 ‘교회 일’을 하고 있다는 본질적 질문도 하게 됐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 결론 내렸다. “나는 사역이란 이름의 중독자였다.” 그 중독에서 탈출하기 위해 그는 자발적으로 개척교회를 찾았다. 예배 외에 특별한 ‘사역’이 펼쳐지지 않는, 펼쳐질 수도 없는 환경의 교회였다. 그곳에서 A씨는 ‘사역이란 이름의 중독증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인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의 집중’ 훈련을 하고 있다.
미국 노스코스트교회 담임 래리 오스본 목사는 ‘우연한 바리새인들(Accidental Pharisees)’이란 독특한 제목의 책을 썼다. 국내엔 ‘당신의 열심이 위험한 이유’(새물결플러스)로 번역·출간됐다. 오스본 목사에 따르면 우연한 바리새인은 ‘최선의 의도와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강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부지불식간에 열성적 믿음의 모형을 추구하고, 따라서 스스로는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주님의 일을 방해하고 마는 당신과 나와 같은 사람’이다. 우연한 바리새인들의 특성을 몇 개 들어보면 그들은 말씀에 아주 열정적이다. 늘 말씀을 연구하는 일을 즐기며 깊이 파고든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나머지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영적 감시견으로서의 의무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삶의 변화는 지극히 미약하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열성적 신자인 우연한 바리새인들로 인해 복음 전파는 약화된다.
물론 우연한 바리새인들에 대한 오스본 목사의 정의에는 반론의 여지도 있지만 지금 한국 교회 내에는 ‘사역이란 이름의 중독’에 빠져 있는 ‘우연한 바리새인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오스본 목사의 지적대로 그것이 한국 교회를 약화시키는 한 원인일지도 모른다. 현대 교회는 자체적인 운영을 위해서 사역이란 바퀴를 쉼 없이 돌리고 있다. 한국교회에 보편화 된 ‘특새’(특별새벽집회)도 그 좋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사역이란 이름의 중독을 부추기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특새’란 이름에서 우연한 바리새인들의 영적 아드레날린 수치는 올라가고 전투의식은 고취된다. 그러나 그 전투의식 고취 자체가 믿음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특새’란 이름을 쓰지 않는 교회들도 있다.
우연한 바리새인들에게 우리 교회들은 거침없이 ‘예배란 이름의 면죄부’를 주고 있다. 하나님과의 임재는 부재한 가운데 한 주일에 여러 번 ‘치러내는’ 예배와 공적 사역에 참여했다는 의식 속에서 우연한 바리새인들은 마음의 위안을 찾는다. 이것이 예배란 이름의 면죄부다!
이제는 우리의 경로 자체를 바꿔야 한다. 한국 교회의 경로를 바꾸기 위해선 고통스럽더라도 우리의 모습을 직시해야 한다. 사순절기간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시대와 인류의 경로를 바꾸셨다.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 소장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