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임순 (4) 전쟁통에도 “고아 돌보겠다” 자원봉사 줄이어
입력 2014-04-01 02:21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에는 전쟁 중에 잡힌 북한군 포로들이 머문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수용된 포로만 17만명에 달한다고 들었다. 게다가 전국에서 수십만명의 피란민이 몰려들어 섬에는 식량은 물론 거의 모든 물품이 모자란 상태였다. 전쟁 중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먹을 것이 없어 거리에서 구걸을 했고, 병에 걸려 길거리에서 목숨을 잃은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나는 시어머니와 함께 어린 딸을 키우며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나는 뜻하지 않게 버려지거나 부모를 잃은 일곱 아기를 만나게 됐다. 전쟁고아를 돌보겠다는 생각은 스물일곱 해를 살면서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기도 끝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 생각하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막상 아기들을 맡아 키우기로 했지만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기들에게 먹일 우유가 모자랐다. 배가 고파 칭얼대는 아기들에게 빈 젖만 물릴 수 없어 이곳저곳을 다니며 식량을 구해야 했다. 정부에서 나눠주는 밀가루를 구해 죽을 끓이고, 삶은 콩을 갈아 두유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먹였다. 거제도 곳곳을 다니며 헌옷을 얻어와 기저귀를 만들었다. 사용한 기저귀를 차가운 냇물에 빠느라 손이 퉁퉁 불었다. 시어머니 손에 맡겨진 딸을 생각하면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아기들을 버려놓고 돌아갈 수 없었다.
며칠 뒤, 아기들을 맡기고 내려갔던 김씨가 대형 천막을 구해왔다. 마침 피란 온 청년들이 도움을 자청해 급한 대로 천막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흙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어 바람을 피했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청년이 “군부대에서 쓰고 버린 드럼통으로 깔고 그 밑으로 난방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청년의 제안 덕분에 며칠간 추운 움막과 천막에서 고생하던 아기들이 따뜻한 철판 온돌 위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됐다. 아기들은 따뜻한 바닥이 좋았던지 이내 곤한 잠이 들었다. 새근새근 잠든 아기들을 보면서 나는 고아들의 엄마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1952년 11월 ‘사랑과 빛의 정원’이라는 뜻의 ‘애광영아원’이 문을 열게 됐다.
애광영아원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에 아기들을 돌봐 주겠다는 섬 주민들이 한두 명씩 찾아왔다. 대개는 피란길에 남편과 자식을 잃은 목회자 사모나 전도사였다. ‘자원봉사 엄마’들이 늘면서 돌봐야 할 아기들도 금세 수십 명으로 불어났다. 힘겨운 피란생활에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환경이었지만 엄마들은 늘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채 아기들을 돌봤다. 기저귀를 빨리 말리겠다며 축축한 기저귀를 몸에 감고 잠을 자는 보모들도 있었다.
이듬해(1953년) 3월 봄이 되자 전염병인 홍역이 섬으로 밀려 왔다. 홍역을 앓은 아기들 가운데 서너 명이 급성 폐렴에 걸렸지만, 당시 거제도에는 의사도 병원도 없었다. 아기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부산까지 가야 했다. 전쟁 통에 유일한 교통수단은 통통배뿐이었다. 부산까지는 3시간이나 걸렸다. 결국 한 아기는 부산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숨을 거뒀다. 세상을 떠난 아기가 영아원에 돌아오자 보모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설립 초기 정신없이 분주한 시간을 보내던 애광영아원은 그렇게 휴전을 맞았다. 피란민과 포로들은 고향을 찾아 도움을 주던 행정기관과 군대시설은 하나둘씩 섬을 떠났다. 휴전은 기쁜 일이었지만, 사람들과 기관들이 섬을 떠나면서 식량을 구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분유는 더 일찍 동이 났다. 밀가루 죽은 더 묽어졌다. 아기들은 허기에 더욱 칭얼댔다. 하지만 밀가루마저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리=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