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議題 선점정치만으로는 부족하다
입력 2014-03-31 02:38
“나눔·희망·정의의 가치가 상호보완적으로 작동할 때 비로소 행복한 사회에 이를 것”
의제(議題·agenda) 선점은 정치적 성패를 가르는 핵심이다. 유권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의제를 정적들보다 앞서 착안해 관련 비전을 제시한다면 여론을 손쉽게 주도할 수 있다. 선거를 앞두고 터무니없는 포퓰리즘 공약이 난무하는 것도 의제 선점 경쟁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과 그 이후 의제 선점 효과를 톡톡히 봤다. 저출산·고령사회, 양극화 심화, 일자리 부족 등의 난제 속에서 그는 경제민주화, 서민 복지 확충, 공기업 개혁, 일자리 창출을 내걸고 달려 왔다. 복지, 경제민주화 등의 의제는 진보가 주로 추구해온 가치였으나 박 대통령은 보수를 표방하면서도 의제 선점에 성공했다. 대선 결과와 이후의 높은 지지율이 그 증거라고 하겠다.
올 들어 박 대통령은 규제완화와 ‘통일대박론’을 들고 나와 다시 의제 선점 공세를 펴고 있다. 특히 ‘통일대박’은 다소 경박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분단 70주년이 내년으로 다가온 지금 젊은층의 통일 무관심 태도를 염두에 두고 그들에게 익숙한 용어를 들이대면서 통일이 한반도의 바람직한 미래라는 의제를 피력한 것으로 나라 안팎에서 크게 주목을 끌고 있다.
박 대통령을 의제 선점의 달인이라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문제는 의제 선점만으로 사안의 본질을 해소하고 당초 의제가 지향하고 있던 최종적인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점이다. 중요한 점은 개별 의제가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하도록 하면서 큰 그림으로 묶이고 확장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다. 의제 선점 이후 치밀한 후속 작업이 없으면 의제는 그저 의제로 남을 뿐이다.
경제민주화는 그 대상이 소득 수준으로 보면 상위 20%의 경제정의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갑을관계로 흔히 요약되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을 완화하고 경제주체들이 정상적으로 경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지만 지난해 하반기 이후 실물경제가 후퇴 기미를 보이자 경제민주화 의제, 즉 정의의 이슈는 슬그머니 논의 현장에서 사라지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기초연금 확장 도입으로 상징되는 저소득층 노인에 대한 지원은 나눔의 가치를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지급 대상은 소득 수준 하위 70%의 노인, 게다가 국민연금과 연계해 연금 가입자가 되레 손해를 보는 쪽으로 수정되면서 나눔의 본래 취지를 잃은 듯 보인다. 그마저도 여야의 대립이 이어지면서 언제부터 실현될지도 확실치 않다. 하위 계층에 대한 나눔의 문제가 원칙론에서 흔들리고 있는 모양새다.
규제완화는 희망의 가치와 맞닿아 있다. 박 대통령은 ‘규제완화라고 쓰고 일자리 창출로 읽자’고 독려했었다. 경제 활성화가 불필요한 규제 때문에 제약을 받는다면 경제주체들의 미래를 향한 희망은 좌절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이 같은 획일적인 접근은 규제를 죄악시하는 편견을 야기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필요한 규제와 불필요한 규제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국리민복에 반하는 사태가 야기될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이 선점해온 의제는 현재 하위계층에 대한 나눔, 중산층을 향한 희망, 상위계층에게 요청하는 정의로 각각 구별되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 모두가 한 가지 목표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예컨대 나눔의 문제는 하위계층에게 희망을 안기는 것일 뿐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는 정의의 실현으로 평가된다. 경제정의의 실현이 중산층의 경제 활력을 높이는 쪽으로 작동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그 사회는 매우 희망적이다.
나눔과 희망과 정의의 가치가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할 때 비로소 우리 사회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행복공화국에 이를 수 있다. 왜 나눠야 하나, 희망이 필요한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정의로운 사회가 추구돼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등의 물음이 동시 병행적으로 진행되고 해소돼야 한다. 의제만 선점한다고 해서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는 없다. 좀 더 치밀하고 통합적인 접근이 아쉽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