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히든챔피언 키운다 (하)] 중견기업 규제에 대기업 잣대… 성장 포기 몸집 줄인다
입력 2014-03-29 02:45 수정 2014-03-29 15:32
(하) 피터팬 증후군 유발하는 암덩어리 규제
사례 1. 샘표는 68년간 간장, 고추장, 된장 등 장류만 만들었다. 잘나가는 장류 회사가 된 샘표는 2006년 직원 수 300명 이상이 되면서 ‘중견기업’이 됐다. 중견기업은 중소기업 가운데 직원 수 300명 이상(제조업 기준)이거나 또는 자본금 80억원 이상, 또는 지난 3년간의 한 해 평균 매출이 1500억원 이상인 기업을 의미한다. 성장세를 달리고 있던 샘표의 발목을 잡은 건 중소기업 적합업종이었다. 2011년 간장, 고추장, 된장 등이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되면서 동반성장위원회는 샘표에 신규 시장 진입을 자제해 달라고 권고했다. 장류가 매출의 61%를 차지하는 업종 전문화 기업 샘표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이후 성장을 위한 노력 자체를 할 수 없게 됐다. 법인세 납부 때도 세액공제가 감소했고 국가지원 중소기업 연구과제에도 참여할 수 없게 됐다.
사례 2. 강관제조 전문기업 A사는 정부의 상수도관 사업에 약 250억원 규모의 생산설비 투자를 하면서 기업 덩치를 키우다가 2012년에 중견기업이 됐다. 상수도관이라는 사업의 특성상 A사의 주요 고객은 공공시장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소기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공시장 참여가 어려워졌다. 현재 A사는 중견기업에서 탈피하기 위해 공장 가동 규모를 축소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7일(현지시간) 독일 방문 중에 “한국에도 독일식 히든챔피언을 키우겠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박 대통령의 발언을 환영하면서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잘못된 기업 구분 방식과 산업 생태계를 바꾸지 않는 한 히든챔피언은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의 시각을 나타냈다.
◇피터팬 증후군을 만든 규제=최근 박 대통령이 규제개혁장관회의 및 민관합동 규제개혁점검회의에서 산업계의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겠다고 밝힌 뒤 중견기업들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중소기업 보호를 위해 만든 각종 제도 등으로 중소기업은 중견기업, 중견기업은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는 ‘피터팬 증후군’에 빠졌기 때문이다.
피터팬 증후군을 유발한 대표적인 규제가 중소기업 적합업종이다. 또 공공조달 시장에서 중소기업 제품의 판로 확대를 도모하기 위해 만든 공공구매제도도 문제다. 현행 제도는 A사처럼 공공조달 시장을 공략해야 하는 업종의 특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밖에 우선지원 대상 기업, 외국인 고용허가제 등의 혜택도 중소기업에만 적용돼 중견기업은 외국인을 포함한 신규 인력 채용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정부의 연구·개발(R&D) 세액공제율도 마찬가지다. B기업은 2012년 중견기업으로 분류된 뒤 조세 부담이 4억원 정도 더 늘었다.
가업승계 문제는 중견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들도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가업승계를 ‘부의 상속’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 보니 독일의 가전업체 밀레나 일본의 자동차 회사 도요타처럼 대를 이어 경영하거나 가족의 성(姓)을 딴 기업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듀오백코리아 정관영 대표는 “회사 대표들 모임에 나가면 대부분이 ‘자식한테는 기업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말한다”면서 “가업승계를 부의 상속이라는 부정적 인식 대신 ‘가치(경영철학)의 상속’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형 히든챔피언 키우자=27일 베를린에서 열린 ‘한·독 히든챔피언 콘퍼런스’에 참석한 이은정 한국여성벤처협회장은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독일의 히든챔피언 DNA를 무조건 따르기보다는 한국형으로 새롭게 진화, 발전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독일은 가업승계를 통해 오랜 세월 기업을 키울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6·25전쟁 이후 빠르게 성장하는 전혀 다른 생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형 히든챔피언을 키우려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대기업, 교육기관, 시민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각종 규제를 없애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특히 대부분의 중소·중견기업들은 공장이 지방에 있어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의 관심도 긴요하다.
이 회장은 베를린 최고의 산업과학단지인 아들러스호프 단지를 롤 모델로 들었다. 이곳에는 히든챔피언이 될 수 있는 강소기업들은 물론 대학과 연구소까지 클러스터 형태로 모여 있다. 토지와 공장 설비는 저렴한 가격에 지원했다. 여기에 지역 내 대학에선 인력과 R&D센터를 지원, 창업부터 성장까지 가능할 수 있도록 했다. 대기업의 역할도 중요하다. 해외 시장에 나갈 때면 협력업체 중소기업과 동반 진출하고 R&D를 지원하는 등 진정한 상생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