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세욱] 통일대박의 추억

입력 2014-03-29 02:10


박근혜 대통령은 올 신년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했다. 내게 이 발언의 첫 느낌은 “무슨 일이래?” 하는 뜬금없음이었다. ‘북한에 대한 원칙 대응’을 입에 달고 살던 대통령이 별안간 통일찬양을 하고 나온 데 대한 어색함 때문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진지했고 통일 추진 의사도 확고해 보여 일말의 기대감이 없지 않았다. 대통령의 의외 발언에 가슴속에 봉인됐던 통일기원의 꿈을 다시 풀어냈다.

2001년 6월 16일 중국 베이징에서 고려항공에 몸을 실었다. 한 기독교 단체에서 평양의대 등에 의료기기를 전달하는 대북사업을 취재하고자 4박5일 일정으로 동행한 것이다.

공항에 도착하자 단체 관계자 A씨가 뭔가를 주섬주섬 챙겼다. 배드민턴채 등 운동용품이 잔뜩 든 선물꾸러미였다. 그는 이를 공항의 한 북한 관계자에게 선물했다. 북한 인사는 “뭐 이런 거를” 하면서 마다하지 않았다.

마중 온 북한의 아태평화위원회 관계자들이 우리를 곧바로 만수대의 김일성 동상으로 안내했다. 일순 머리털이 쭈뼛 섰다. “김일성 동상 참배를 강요하면 어쩌나.” “어떤 핑계를 대고 빠져 나가야 하나.” “국가보안법을 위반하게 되는 것 아닌가.”

A씨는 초조함 가득한 내 얼굴을 보더니 씩 웃으며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참배나 묵념 필요 없고, 잠시 서 있기만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20m 크기의 으리으리한 구릿빛 동상을 보기만 했다. 북측도 우리를 동상 앞에 데리고만 왔을 뿐 특별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북한이 관광객들에게 의무적으로 김일성 동상 참배를 강요한다던데 우리에게는 별 얘기가 없네요.” A씨는 “자주 북한과 접촉하다 보니 우리가 ‘우상을 섬기지 마라’는 기독교 교리를 따른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요식행위 후 남북의 간극은 한결 좁아졌다. 북한의 감시도 예상보다 헐거웠다. 밤에도 자유롭게 돌아다녔고 아침에 숙소 인근 보통강 주변을 조깅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자정쯤 고려호텔에 놀러갔을 때 술에 취한 20대 젊은 여성이 길에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평양에서 가장 번화한 창광거리에서 북한 청소년 4명이 벌이는 술 시합을 재밌게 지켜보기도 했다. 평양의대 의사가 우리 측이 전달한 첨단 치과기기를 받고 아이같이 좋아하며 거듭 “고맙다”고 고개를 조아렸다.

북한이 당시 우리 일행에게 가감 없는 민낯을 보여준 것은 이 단체가 쌓은 신뢰 덕분이다. 김일성 동상 참배를 강요하지 않은 것도, 뇌물로 여길 수 있는 남한 선물을 스스럼없이 받은 것도, 야간 통행을 제지하지 않은 것도 신뢰 없이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다.

이후 경제부 기자로 2004년, 2007년 두 차례 개성과 금강산을 방문했다. 개성 주민, 금강산 안내원들의 남측에 대한 시선은 살가웠다. 방북 와중에 머릿속에서 통일의 경제 효과에 대해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다. 광활한 미개발 지역, 고령화에 따른 남한의 근로인구 감소 우려를 해소해 줄 값싼 북한 인력, 풍부한 지하자원, 계속되는 남북 교류. 속으로 “정말 대박이다”고 외쳤다.

하지만 2008년 이후 남북의 문이 닫히고 적대의 시절로 퇴보했다. 어느덧 통일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방북 경험을 추억으로만 간직한 채 마음속에 묻어뒀다. 그렇게 6년이 흘렀다.

박 대통령의 발언 이후 두 달여. 통일대박론은 대중 속에 조금씩 퍼져 갔다. 뿌리 깊은 반공의식에 젖어 있던 노인·장년층이 통일을 예찬하는 모습도 낯설지 않다. “‘통일의 꽃’(임수경) 저주하더니 ‘통일의 꽃할배’됐네”라고 진보세력은 비아냥대지만 통일담론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통일대박론을 채울 내용이나 청사진이 부실해 보인다. 정부는 통일은 대박이라면서 필수조건인 교류와 경제협력에는 엄격한 잣대를 고집한다. “천안함 피격 사과, 비핵화 약속 없이 5·24조치(남북교류 단절) 철회는 없다”는 입장도 여전하다. ‘조건부 북한 지원’과 ‘통일대박’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중국 베이징대 진징이 교수는 최근 한 칼럼에서 “‘장밋빛 통일’은 있지만 통일의 상대인 북한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며 일방주의적 통일담론 전파를 우려했다.

1987년 12월 북한이 KAL기를 폭파, 탑승객 115명이 희생됐다. 사망자 수는 천안함 피격 때(46명)의 2.5배다. KAL기 사건 직후 집권한 노태우정부는 그러나 정확히 참극 4년 후인 91년 12월 북한과 ‘불가침·화해·교류’를 기본으로 한 남북합의서를 채택했다. 이는 남북 데탕트(긴장완화)를 불러온 기념비적 문서로 평가받는다. 북한은 아직까지도 KAL기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하지 않고 있다.

천안함 해법도, 통일시대를 앞당길 묘책도 중요하다면 지금이야말로 치밀하면서도 유연한 정치력·협상력이 절실한 때다. 20여년 전의 군사정권보다 발상의 전환이 더디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가 아닐까. 모처럼 고개를 든 통일의 꿈을 또다시 묻어두고 싶지는 않다.

고세욱 경제부 차장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