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황영택] 기도와 찬양, 두 바퀴로 가는 휠체어 고난이 왜 축복인지 증거합니다

입력 2014-03-29 02:57 수정 2014-03-29 12:11


휠체어 성악가 황영택 집사

수족관 폴 포츠, 야식배달 폴 포츠, 정비공 폴 포츠…. 이 시대 꿈과 희망의 아이콘 ‘폴 포츠’가 또 탄생했다. ‘휠체어 성악가’ 황영택(48·부천교회) 집사는 최근 SBS 프로그램 ‘스타킹’에서 폴 포츠와 함께 ‘네순 도르마’를 불러 화제가 된 인물. 감히 못 불렀던 노래다. 폴 포츠가 있었기에 그는 처음으로 용기를 냈다. “하반신 마비라는 신체 조건에 호흡도 안 되고 도저히 낼 수 없는 음역대였습니다. 오로지 그와 함께한다는 목적만 갖고 연습했지요. 저에겐 엄청난 기회였어요. 2시간30분 녹화하는 동안 그는 ‘할 수 있다’는 긍정 에너지를 계속 심어줬습니다.” 지난 26일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부흥로 부천교회에서 ‘휠체어 폴 포츠’ 황 집사를 만났다.

절망의 끝, 죽어버리자

키 180㎝, 몸무게 72㎏의 훤칠한 훈남 스타일. 청년 때의 황 집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스코에 입사했다가 형님의 권유로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크레인 조종 면허까지 취득하고 열심히 일했다. 대인 관계도 좋아 늘 ‘술친구’가 많았다.

그에겐 꽁꽁 감추고픈 비밀 하나가 있었다. 여섯 명의 어머니, 어머니가 모두 다른 형제들 틈에서 그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2남4녀 중 막내. 네 살 때 친엄마 품을 떠나 다섯 번째 어머니와 살았다. 늘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워했다.

그러다 어느 날 거래처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164㎝의 키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 사이즈는 55쯤 될까.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네 번째 만난 날 프러포즈했다. 결혼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 꿈같은 시간을 보내며 부부로 살았다. 비로소 이뤄낸 행복한 가정이었다.

1992년 10월 21일. 모든 것을 앗아간 바로 그날이다. 건설 현장에서 전봇대 같은 콘크리트 파일을 땅속에 시공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15m 길이의 파일 무게는 2t 정도. 크레인으로 파일을 당기고 있었는데 70도 각도에서 그만 와이어가 ‘뚝’ 끊어지고 말았다. 파일이 운전석으로 날아들었고 그는 ‘으악’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수술실과 중환자실 오가기를 수차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두 손 모은 아내였다. 침상 끝에서 남편의 두 발을 부여잡고 아내는 “살려만 달라”고 기도했다. 아내의 간절함이 그를 눈뜨게 했지만 동시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사고 이후 10여일 만에 깨어났지만 배꼽 아래는 더 이상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반신 마비 척수장애 1급1호 진단을 받았다. 손에 잡히는 것을 마구 던지며 “내 다리 내놔”라고 소리쳤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병원에서 2년을 보내고 퇴원했다.

“집으로 온 뒤 절망감이 더 컸어요. 병원에선 모두 환자니까 ‘그런가 보다’ 했는데, 밖에선 휠체어 타고 가다 작은 턱에도 걸려 넘어지고. 그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건 저를 바라보는 시선들이었어요. 매일 술만 마시고 다녔습니다.” 6개월을 술로 보냈다. 술김에 교통사고가 나지 않을까, 강물에 빠지지 않을까, 그렇게 죽어버리자 생각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보니 돌이 채 안 된 아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몽사몽의 아빠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 내 아빠 맞아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옆에선 아내가 곤히 자고 있었다. “당신 내 남편 맞냐고요”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아! 내가 아빠였지. 남편이었어. 내가 죽어버리면 우리 아들은 아비 없는 자식으로, 아내는 과부로 또 얼마나 힘든 삶을 살 것인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족을 위해서라도 다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내의 기도, 소망을 갖다

아빠의 자리, 남편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아내 박금주(45) 집사의 기도 덕이다. 모태신앙인 아내는 남편에게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대소변 조절이 안 돼 실수하기를 여러 차례. 부끄럽고 창피해 하는 남편에게 “괜찮아요”라며 따뜻한 물로 그를 정성껏 씻겼다. 23세 때부터 그렇게 남편을 보살폈다. 그런 아내를 따라 가끔 교회를 왔다 갔다 했다. 문득 아내가 진지하게 믿고 따르는 그분을 만나고 싶었다. 2개월 동안 성경을 묵상하며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 삶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했다.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뜻이 있다”고 알쏭달쏭한 답을 안겨주었다.

“무조건 살고 보자 했습니다. 병원 재활팀에서 휠체어 테니스를 시작했어요. 휠체어는 제 다리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리가 빨라야 테니스를 잘 칠 수 있잖아요. 휠체어를 타고 45도 경사로 길을 아침저녁으로 100번 이상 오르내리며 훈련했습니다. 어느 날 코트에 들어서니까 꼭 날아갈 것 같더라고요.”

테니스를 시작한 지 5년 만에 그는 장애인 테니스 국가대표 선수로 뽑혔다. 99년 방콕 장애인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땄다. 세계랭킹 36위까지 올랐다. “선수 생활을 하며 또 다른 세상과 만났습니다.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을 보게 되면서 제 삶이 변하고 성장했지요. 당시 네 살 된 아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아들이 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더라고요. 오죽하면 장래 희망이 아빠처럼 장애인이 되는 거라고 할 정도였다니까요. 하하하.”

2001년 스위스에서 열린 월드컵대회를 마치고 호텔에서 잠을 자던 중 그는 꿈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자신을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을 만났다. 은혜를 깨달은 순간이다. 침대에 엎드려 회개 기도를 드렸다. 그간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를 생각하니 갑자기 복받쳐 올랐다. 육체적 재활은 성공했지만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음을 고백했다. 나를 구원해 주고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을 위해서라도 그분의 가치 기준에 맞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귀국하자마자 기도원에 올랐다. 목숨 걸고 7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다. 예배드리고 찬송을 부를 때면 새 힘이 솟았다. 한두 시간씩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면 평안해졌다. “이렇게 평생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겠습니다.”

도전은 다시 시작됐다. 대학에 들어가 성악을 배우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하나님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하나둘씩 길을 여셨다. 교회학교에서 같이 봉사했던 정상엽(부천 참된교회) 집사가 수험생을 위한 참고 서적들을 차 트렁크에 한 아름 실어줬다. 정 집사는 서울대 다니는 제자를 과외교사로 소개했다. 운동 중 틈틈이 휠체어4중창팀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 팀을 지도했던 테너 국윤종씨가 그의 실기교사가 돼 줬다. 이태리어, 독일어 가사를 반복해서 읽고 암기했다. 허리에 벨트를 묶고 호흡, 발성연습을 했다. 새벽기도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하루라도 놓치면 마치 낙방할 것 같았다. 그 결과 그는 웃었다. 2003년 37세에 성결대 성악과에 입학했다.

장애인으로 사는 것, 희망의 시작이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휠체어 성악가로 사는 이유다. 그는 “하나님이 나를 농기구 쓰듯 하신다”며 “하나님이 필요한 곳에 머물러 몸이 불편한 이들과 함께 나누고 찬양하게 하신다”고 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그는 2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장애인과 환우를 위한 무대를 특히 좋아한다. 매월 셋째 주일 성결대 동문들과 한강성심병원에서 환우들을 위로하는 콘서트를 연다. 2011년 신촌세브란스병원 한강성심병원 국립재활원 등과 함께 ‘희망나눔 콘서트’를 가졌다. 희귀병에 걸린 어린이를 돕기 위해 비장애인 200여명과 함께 핸드바이크를 타고 전국 1522㎞를 돌며 콘서트를 열어 후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황 집사는 “나를 보고 내 이야기를 들으며 다들 희망을 얻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황 집사와의 인터뷰는 유쾌했다. 사실 힘든 시간을 들춰내는 건 고역인데, 그는 지나온 일들을 이야기하며 내내 웃고 농담을 던지며 쉼 없이 떠들었다. 문득 기자는 궁금했다. “힘들지 않습니까?”

“왜요? 저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저리고 욕창도 생기고…. 날을 꼬박 새기 일쑤입니다. 아직도 대변 조절이 안 돼요. 치료도 계속 받아야 하고요.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많이 아파요. 그런데 이렇게 다 털어놓으면 상처들이 치유돼요. 오늘도 이렇게 얘기하면서 저를 이만큼(두 팔로 크게 원을 그림) 치유하는 겁니다.” 고난이 왜 축복인지, 그는 온 몸으로 증거했다.

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