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모름 속에서 모름을 견디고 있는 비경… 시인 20명이 엮은 ‘시인으로 산다는 것’
입력 2014-03-28 02:34
시인들은 어떤 존재인가. 이렇게 말해보자. 시인들은 자신만의 동굴을 파고 들어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시마(詩魔)가 오기를 기다리는 존재일까. 아니면 시적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찬이슬을 맞으며 새벽길을 쏘다니는 존재일까. ‘시인으로 산다는 것’(문학사상)은 강은교 시인에서부터 이영주 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대 시인 20명이 들려주는 ‘나의 삶 나의 시’ 이야기이다.
“나는 사십여 년을 시를 써왔지만 시를 잘 모른다. 그 모름 속에서 모름을 견디고 있을 따름이다. 거대한 모름의 한 모서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본능에 가까운 욕망으로 시를 쓴다. 때로는 고통과 분노로 쓴다.”(장석주-시는 전쟁이다!)
‘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거개의 시인들은 ‘잘 모른다’는 대답을 내놓는다. 정호승 시인 역시 아직 시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고백한다. “모른다는 것은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는 지금 모르기 때문에 시를 쓸 수 있다.”(정호승-시의 길 위에서)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일종의 천형이기도 하다. 정병근 시인은 이렇게 털어놓는다. “‘천형이 내렸다.’ 고은 선생님의 첫마디였다. 격려 어린 칭찬 정도로 알아들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인사동 어디 술집에서 뒤풀이가 이어졌는데 나중에 보니 다른 수상자들은 모두 가고 혼자 남아 있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신 김홍성 주간이 숙소로 가자고 붙잡았지만 나는 무슨 심사인지 뿌리치고 나왔다.”(정병근-나는 시인인가?)
시는 어쩌면 시인이 뿌리치고 나온 ‘무슨 심사’를 형상화하는 과정의 언어인지도 모른다. 그 형상화는 번개 치는 날, 순간의 빛으로 드러난 사물의 본질을 본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 본질을 보았다고 해서 삶이 달라지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천형일 수밖에 없는데, 이영주 시인의 말이 걸작이다.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순간이라는 결정체가 남기고 간 흔적의 물질을 좇는 일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말하는 ‘잘사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쓸데없는 일인 것이다.”(이영주-벽에 대한 기록)
돈도 밥도 명예도 되지 않는 시를 그래도 남편처럼 아내처럼 애인처럼 붙들고 살아가는 이유야말로 이유 없음이다. 이유 없음이 시를 쓰게 한다. 모름이 시를 쓰게 한다. 산문집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 당대의 시인들이 시에 대한 생각을 함께 증언하는 비망록이기도 하다. 시인을 꿈꾸는 미지의 후학들에게 문학적 지평을 확장해주는 지침서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