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혜진] 하얀 도라지
입력 2014-03-28 02:31
한 농부가 있었다. 그는 산 밑에 아담한 도라지 밭을 갖고 있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시간이 쌓여 잡초가 자라고 해충이 날아들고 장마도 찾아왔지만 농부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은 비록 작고 보잘것없더라도 아름다운 꽃이 활짝 필 때까지 지켜 주리라 굳게 다짐했다.
어느 날 농부의 이웃에 새로운 사람들이 이사를 왔다. 그들 밭에는 농부가 보지 못한 크고 화려한 작물들이 심어졌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향기가 넘실넘실 풍겨올 때면 농부는 자꾸만 그 밭으로 마음을 빼앗겼다.
하루 이틀 그 밭을 서성이는 일이 잦아졌다. 주인의 손길이 예전 같지 않아도 도라지들은 저들끼리 조그맣게 싹을 틔웠다.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난 여태껏 뭘 했나 자괴감을 느끼며 찾아든 밭엔, 어느새 잡풀이 쑥쑥 자라 있었다. 무엇이 잡초이고 무엇이 도라지인지 쉽게 찾아내기 힘들었다. 농부는 점점 더 밭에 가기가 싫어졌다. 대신 이곳저곳을 떠돌며 한탄했다. 난 원래 저런 풀만 자라게 할 사람이 아니오. 어느 해는 비가 오고, 어느 해는 바람이 세고, 어느 해는 태양이 뜨겁다 보니, 그냥 소박한 도라지 몇 이랑만 심게 되었소. 날만 개면 내 밭도 이렇게 화려해질 것이오.
하지만 주인도 찾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은 해충들이 그의 밭을 탐하기 시작했다. 사각사각사각…. 벌레들의 합창만 시끄러운 채 흉물이 된 그곳에 아무도 발을 들이려 하지 않았다. 농부는 밭 주변을 배회했다. 점점 말라 갔고, 눈은 빛을 잃었다.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차오르면서 가슴이 쓰렸다.
보름달이 뜨는 어느 날 밤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던 그의 눈에 희뿌연 빛이 저 멀리 반짝이는 게 보였다. 눈길을 더듬어 보니 그의 도라지밭이었다.
아니 귀신인가. 자포자기가 된 농부는 살며시 다가갔다. 그곳에 휘영청 보름달 빛 아래, 작게작게 피어나는 하얀 도라지꽃이 보였다. 언젠가 농부가 이른 아침 심어놓은 도라지들이 거칠고 무성한 잡초 사이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달빛보다 하얀 꽃을 피워 내고 있었다. 방긋 웃고 있었다.
농부는 그제야, 흰 꽃 앞에 엎드려 엉엉 울고 말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뜨겁고 굵은 눈물방울이 그의 밭으로, 그의 마음으로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이혜진(해냄출판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