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황제 노역’ 집행정지를 둘러싼 불편한 진실

입력 2014-03-28 02:41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이 ‘황제 노역’을 중단하고 벌금을 내도록 한 검찰의 조치는 당장은 여론의 지지를 받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무엇보다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하루 5억원 노역을 허용한 검찰과 법원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허씨의 파렴치만 부각되는 것은 우리 사회 공론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대검이 노역을 중단하고 벌금을 강제로 받을 수 있다는 법리 검토는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형사소송법을 임의로 해석한 혐의가 짙다. 형 집행을 정지할 수 있는 사유로 열거된 건강, 고령, 출산, 보호해야 할 가족 등이 있을 때는 모두 수형자인 피고인의 인권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조항 끝 부분에 ‘기타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란 당연히 피고가 수형을 감내할 수 없는 사유로 일일이 열거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는 것은 법조문 해석상 명백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애매한 것은 피고인의 이익으로 한다’는 형사법 해석의 대원칙을 어겼다.

벌금을 내지 않고 노역하는 모든 범죄자에 대해 검찰이 이번과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이번 조치는 법집행의 형평성에 정면으로 어긋날 수 있다. 벌금을 내지 않고 노역을 택한 허씨의 비양심적인 처신은 당연히 비난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법대로 집행한다는 검찰이 이런 식으로 대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검찰의 이번 결정은 위헌소지도 적지 않다. 우선 사법부의 판결을 행정부인 법무부의 외청에 불과한 검찰이 뒤집는 것은 헌법에 규정된 3권 분립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법원의 판결은 아무리 잘못됐다 하더라도 상급심에서 다퉈져야 하고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되는 것 아닌가. 우리 검찰은 대법원보다 위에 있는 조직인가.

황제 노역 사건의 단초는 한 지역에 오래 터 잡고 사는 이른바 향판(鄕判)과 향검(鄕檢)의 문제에서 출발됐다. 안정된 재판을 추구한다는 원칙에서 도입된 향판은 이제 바꿔야 할 때가 됐다. 지역 사회를 잘 알아 형편에 맞는 판결을 하라고 시작된 이 제도는 사실상 비리의 온상으로 변했다. 이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뒷전에 둔 채 전혀 예측가능성이 없는 결정으로 검찰과 법원이 위기를 모면하려고 시도한다면 국민적 반발에 직면할 것이다.

법원과 검찰은 법치주의를 입에 달고 사는 조직이다. 법을 악용한 허씨의 행태가 밉다면 법원과 검찰이 머리를 맞대고 환형유치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법개정이 필요하면 법률을 다시 만들든지 바꾸든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급한 김에 여론을 등에 업고 함부로 칼을 휘두를 때는 기분이 좋을지 모르겠지만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먼저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