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성기철] 메밀차 러브샷

입력 2014-03-28 02:44

16대 대선을 한 달 앞둔 2002년 11월 16일 새벽 1시30분.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가 서울 여의도 국회 앞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심야 담판을 통해 야권후보 단일화에 전격 합의하고 기자회견을 마친 뒤 뒤풀이하러 나온 것이다. 두 사람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취재기자와 양측 당직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른바 ‘러브샷’을 했다. 대선 후보들의 소탈한 행보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음은 불문가지다.

이날 후보 단일화 합의와 러브샷은 선거 분위기를 확 바꾸게 했다. 한나라당은 야합이라고 거세게 비난했지만 1강2중의 ‘이회창 대세론’은 급격히 흔들렸다. 노 후보에게 등을 돌렸던 야권 성향 유권자들을 재결집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노 후보 당선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게 틀림없다.

러브샷(love shot)은 잘못 사용되는 한국식 영어다. 술자리에서 팔을 엇갈리게 걸고 건배한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영어 단어를 그대로 해석하면 ‘사랑의 탄환’쯤 될 것이다. 물론 사랑하는 연인을 총으로 쏘는 것이 아니라 큐피드의 화살, 즉 구애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해야겠다.

그래서인지 타인과의 교제를 중시하는 정치인들이 러브샷을 은근히 즐긴다. 기업인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은 러브샷에 참 익숙하다. 그는 대통령 당선인 시절이던 2008년 2월 16일 국무위원 내정자 워크숍에 참석했다가 한승수 국무총리 내정자와 폭탄주 러브샷을 했다. 그해 4월 22일에는 18대 총선 한나라당 당선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강재섭 대표 및 여러 당선자들과 러브샷을 했다.

2010년 8월에는 한나라당 연찬회에 참석한 안상수 대표와 홍준표 최고위원이 폭탄주 러브샷을 했다. 고향(경남)과 경력(검사)이 같은데도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이 주변의 권유로 화해의 술잔을 든 것이다. 한참 동안 형, 아우 하며 웃음을 나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가 26일 여의도 한 식당에서 열린 창당대회 뒤풀이에서 메밀차로 러브샷을 했다. 신당 내 화합을 다짐하며 러브샷을 하되 술이 아닌 전통차를 택한 것은 새 정치의 표현이라고 본다. 문제는 러브샷을 한다고 해서 화합이 보장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수틀리면 언제 갈라설지 모르는 게 정치인 사이다. 노무현과 정몽준은 대선 전날 밤 등을 돌렸고, 안상수와 홍준표는 지금 경남지역 선거전에서 견원지간이나 마찬가지다.

성기철 논설위원 kcs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