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임순 (2) 엄격한 유교 집안서 어머니와 몰래 교회 출석

입력 2014-03-28 02:23


나는 1925년 3월 20일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나의 부친은 내가 갓난아기 때 만주에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오빠와 나는 큰아버지 댁에서 어머니와 함께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책을 참 좋아하셨다. 반상이 뚜렷한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셨지만,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아홉 살이 될 때까지 남장을 시켜 사랑채에서 한문을 배우게 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촛불을 켜놓고 늘 책을 읽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큰집 역시 엄격한 유교 집안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 덕분에 교회에 다닐 수 있게 됐다. 이웃집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성경책을 한 권 선물했는데, 어머니는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믿음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 시절에는 과부가 교회에 나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교회에 한 번도 가보신 적은 없지만 분명 믿음으로 구원 받으셨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교회에 다니는 걸 좋아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전해주는 ‘노아의 방주’와 ‘홍해의 기적’ ‘오병이어’ 등 성경 이야기가 신기했고 흥미진진했다. 오르간 반주에 맞춰 손뼉 치며 노래 부르고 함께 춤을 추는 것이 ‘시골 어린이’였던 내게 얼마나 신나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단, 큰아버지 눈에만 띄지 않으면 됐다.

어머니는 늘 교회에 다녀오는 나를 마중했다. 여섯 살 무렵의 어느 비 오는 날, 비를 피해 뛰어오는 내게 어머니는 활짝 웃으며 등을 돌려대셨다. 업히라는 신호였다. 어머니의 등은 너무나 포근해서 마치 구름처럼 하늘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어머니 등에 업혀 집에 들어서는데 사랑채 앞에서 큰아버지와 마주쳤다. 긴장해서 꼭 다문 입 안으로 “하나님, 큰아버지가 저를 봤어요. 저 이제 죽었어요. 살려 주세요”라는 기도가 맴돌았다.

큰아버지가 “임순이, 어디 다녀오니?”라고 물으셨다. 덜덜 떨고 있는데, 어머니가 굳은 목소리로 “임순이 예배당 갔다 온답니다”라고 말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랬더니 큰아버지께서 “아, 그래? 너는 이 다음에 커서 전도부인이 돼서 어머니 모시고 온 데 다 다니면서 전도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내 입에서는 “하나님, 이제 나는 살았습니다”라는 기도가 흘러나왔다. 어머니는 내 신앙을 지켜주기 위해 에스더와 같은 용기를 내셨고, 그 신앙이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고 있음을 나는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친척들에게 “교회에 가시자”고 얘기한 기억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를 믿지 않는 집이 없게 됐다.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 행복한 성장기를 보냈지만, 고등여학교를 졸업하던 1944년 나는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하게 됐다. 졸업을 앞두고 서류에 부모님의 도장을 받아와야 했는데, 그곳엔 큰아버지의 도장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어려서 생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큰아버지의 보살핌 속에 성장했지만, 호적까지 큰집으로 돼 있을 줄은 몰랐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시던 어머니였지만, 이때만큼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며칠을 밥도 거른 채 이불만 둘러쓰고 드러누웠다.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셈이었다.

어머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신 채 속만 태우셨다. 방에서는 어머니가 큰어머니께 “형님, 임순이가 학교도 안 가고 누워만 있어요. 자기 서류에 왜 큰아버지 도장이 찍혀 있느냐고 묻길래 대답을 안 했더니, 며칠째 저러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아요?”라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며칠 뒤 큰어머니의 여동생인 큰댁 이모가 나를 찾아왔다. 그러고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지금까지 나를 길러주신 어머니가 사실은 작은어머니였다는 것이다.

정리=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