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독일 방문] “나는 동베를린 통해 북한을 봤다” 통일 의지 밝혀… 당시 靑 공보비서관 일기
입력 2014-03-27 03:04
“마치 국내 행사에 참석하시는 듯 조용히 현관을 나서신 대통령께서는 근혜, 근령, 특히 지만군의 재롱 섞인 인사에 손을 흔드시면서 청와대를 출발했다.”
50년 전인 1964년 12월 독일을 방문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록을 담은 ‘붕정칠만리(鵬程七萬里)’에는 박상길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이 남긴 방독일정기가 수록돼 있다. “하늘이 쾌청하여 대통령 내외분의 장도(壯途)와 성공을 축복하는 듯했다”며 비장하게 시작하는 일정기는 청와대를 출발할 때부터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할 때까지 열흘 동안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독일을 찾았던 박 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날짜마다 ‘맑음’ ‘흐림’ 등으로 날씨까지 적어놓았을 만큼 꼼꼼한 기록들이 눈에 띈다.
무려 28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독일 땅에서 도착성명을 발표하기 직전 박 전 대통령을 바라보던 박 비서관은 “글과 말로만 보고 듣던 유럽의 심장부 한복판에 바로 우리 대통령 내외분이 힘차게 서 계시지 아니한가”라며 감격했다. 다음 날 하인리히 뤼브케 서독 대통령 예방을 앞둔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선 “(긴 비행에 따른) 피로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하신 듯했다”며 솔직하게 표현하면서도 “굳은 결심을 감출 수가 없는 것같이 보였다”고 밝혔다.
서독의 수도 본을 방문한 일화를 통해서도 가난한 나라에서 온 대통령이 느꼈을 벅찬 감회를 전했다. 박 전 대통령이 본 시청 귀빈 방명록에 한글로 서명을 하자 빌헬름 다니엘스 시장은 “구텐베르크보다 한국인들이 먼저 인쇄술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걸 유럽 사람들도 기념하고 있다. 내 생각에는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라고 말했다. 이에 박 전 대통령 일행이 깜짝 놀라면서도 자부심을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베를린 장벽을 찾은 박 전 대통령은 장벽 너머로 동베를린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고 한다. 이어 박 전 대통령은 “나는 오늘 동베를린을 통해 북한을 보았다”며 남북통일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 장벽을 떠나면서는 동독을 탈출하다가 사살된 18세 노동자의 기념비에 붉은 카네이션 꽃다발을 헌화했다.
함보른 광산을 방문해 우리 광부 및 간호사들과 만나는 장면은 박 전 대통령 방독 일정의 하이라이트로 종종 거론된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도록 하겠다”며 박 전 대통령이 눈물의 연설을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방독기에는 짙은 오렌지색 두루마기를 입은 육영수 여사가 행사장에 입장해 자리에 앉으면서 동시에 눈물을 보였고, 300여명의 광부와 한복을 입은 50여명의 간호사들도 눈시울을 적셨다고 기록됐다. 이때 박 전 대통령의 표정은 상세하게 설명돼 있지 않다. ‘눈물의 연설’은 공식적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장내의 모든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는 표현이 당시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박 전 대통령은 광부들의 숙소를 들러 방 하나하나를 둘러본 뒤 광부 한 사람 한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박 전 대통령이 이들에게 준 작별선물은 국산 ‘파고다 담배’ 500갑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광부와 간호사들 앞에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와 있는데 한국사람들이 제일 일을 잘한다고 칭찬을 받아 기쁘다”며 “조국을 빛내 뒤에 오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 달라”고 당부했다.
유성열 기자 nukuv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