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임순 (1) 6·25 거제 피난길서 전쟁고아들과 운명의 첫 만남
입력 2014-03-27 02:50
일제의 식민 지배와 광복, 한국전쟁, 고아들과 장애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기 위해 벌인 사투 등 90년 가까운 시간을 살아오면서 어느 하루 특별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가장 선명히 떠오르는 순간은 62년 전 어느 추운 겨울날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11월, 나는 갓 돌을 넘긴 딸을 업고 시어머니가 피난 가 계신 거제도에 내려갔다. 시어머니는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를 설립해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뿌리를 놓은 만우 송창근 목사의 사모다.
피난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갓난아기를 안고 시어머니와 함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데 뒤에서 누군가 ‘김 선생’ 하며 나를 불렀다. 뒤돌아보니 내가 대학 다닐 때 공무원 신분으로 강의하러 오던 김원규씨가 서 있었다. 김씨는 피난민을 관리하기 위해 거제도에 파견돼 있었다. 내가 인사를 하자 김씨는 다짜고짜 나를 거제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장승포 언덕으로 데리고 갔다. 지금은 포장된 도로가 놓여 있지만 당시 장승포 언덕은 땅이 질퍽하고 경사가 급해 오르기 힘든 언덕이었다. 숨이 턱까지 찬 상태로 언덕 위에 오르자 흙벽과 가마니로 엉성하게 얽어 만든 움막들이 서 있었다.
김씨는 나를 그중에서 가장 허름한 움막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움막 안에는 정신없이 울어대는 갓난아기가 일곱이나 있었다. 김씨는 “피난민들이 살기가 너무나 어려워 버린 애들입니다. 김 선생이 이 아기들을 좀 돌봐주세요”라고 말했다. 난감한 부탁이었다. 피난 온 지 얼마 안 돼 집에 돌아가는 길도 모르고, 또 젖먹이 딸아이를 시어머니에게 맡겨 놓고 따라온 터다. 게다가 일곱 아기를 맡는다는 건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조심스럽게 김씨에게 ‘몇 시까지 봐주면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몇 시까지가 뭐요, 이렇게 불쌍하고 어린 것들을 돌볼 생각조차 못할 거면 김 선생은 도대체 뭐하려고 공부했소?”라고 되물었다. 그는 ‘부탁한다’는 말만 남긴 채 황망히 언덕을 내려갔다. 주위를 돌아보니 움막 안에는 분유통과 냄비 하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정말 ‘악다구니’처럼 울어댔다. 아기들을 안고 업고 달래다 보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학교 채플 시간에 김활란 총장이 늘 강조하던 말씀이 생각났다. “어떤 일이든 시작하기 전에 기도로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지 않고 시작하면 그 일은 절대로 성사되지 않는다.”
집에 남아 있는 시어머니도, 어린 딸도 잊은 채 울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왜 제게 공부를 시키셔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맡기시려 하시나요? 저는 못합니다. 다른 일 시켜주시면 무슨 일이든 하겠지만 이 일은 절대 못합니다. 정말 자신이 없습니다.”
밤새 울면서 기도하던 중 깜빡 잠이 들었다. 멀리서 새벽기도 시간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들렸다. 새벽 종소리에 몸을 추스르려는데 어디선가 크고 분명한 소리가 들렸다. “왜 네가 아이들의 수준으로 내려가려고 하느냐. 아이들을 네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되지 않겠느냐?” 이 꾸짖음이 이후 62년간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나를 이끌었다. 27세 때의 일이다.
곁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기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하나님, 이 어린 생명들을 지켜주세요. 부족한 저라도 쓰시겠다면 나약한 제게 용기를 주셔서 이 아기들에게 따뜻한 엄마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약력=△1925년 3월 20일 경북 상주 출생 △1949년 이화여대 가사과 졸업 △1952년 애광영아원 설립 △1980년 애광특수학교 설립 △1989년 막사이사이상 사회지도부문 수상 △현 거제도 애광원 원장, 한국기독교장로회 장승포교회 은퇴장로
정리=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