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백팩의 윤리학
입력 2014-03-27 02:45
“이것들의 아침의 유두분면(油頭粉面)과, 한 낮의 춤과, 황혼의 어둠 속에 이것들이 잦아들어 돌아오는- 아스라한 침잠이나 지킬 것인가.” 미당 서정주가 한국전쟁 때 쓴 시 ‘상리과원(上里果園)’의 한 구절이다. 미당은 이 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52년 봄 정읍 내 누이의 과수원에 잠시 있을 때 쓴 것이지만 생각의 뼈다귀는 자살미수 뒤의 햇볕의 간절도(懇切度)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미당 자서전’에서)
여기서 ‘이것들’이란 봄날 과수원에 그득히 핀 꽃들의 웃음판을, ‘유두분면’은 기름 바른 머리와 분 바른 얼굴, 즉 화장한 여성의 모습을 각각 지칭한다. 화장은 예부터 여성들의 특권으로 치부되어 왔다. 하지만 요즘 출근길 전철에서 요행수로 빈 자리를 차지한 젊은 여성들 가운데 버젓이 화장품을 꺼내놓고 기초화장은 물론 마스카라에 이르기까지 치장을 하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창피를 모르는 우리 시대의 불량(不良)을 보는 것 같아 눈살이 찌푸려진다. 빠듯한 출근시간에 쫓겨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다가도 그중 몇몇은 낯이 익을 정도로 상습적인 탓이다.
유두분면족에 보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또 다른 족속이 나타났으니 사무용 배낭을 어깨에 멘 이른바 백팩(backpack)족이 그들이다. 노트북에서 칫솔, 치약에 이르기까지 사무직 샐러리맨들의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 있는 백팩을 두고 도시를 횡행하는 유목인의 보따리요, 이동하는 사무원들의 개인사물함이라고 얼마든지 예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팩족들의 모순은 백팩을 메는 순간, 자신의 등 뒤를 책임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나이 든 승객들이 백팩족 사이를 비집고 다른 칸으로 이동하려 할 때조차 그들은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거나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하나의 벽으로 존재한다. 게다가 마스크에 모자까지 눌러쓴 젊은 백팩족들의 정체성은 철저한 자기 폐쇄로 읽힌다. 그들이 전철에서 스마트폰 게임을 즐긴다고 해서 트집을 잡는 게 아니라 그런 ‘난 나일 뿐’이라는 개인주의가 낳은 안하무인의 몰염치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등이 남에게 읽힌다는 걸 의식하지 못한다.
등은 내가 볼 수 없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자아요, 존재의 또 다른 이면이다. 등은 우리 모두의 뒤에 위치함으로써 그 등이 스쳐간 시간의 집적을 떠올리게 한다. 등은 한 존재의 동굴 속에 그려진 벽화이다. 전철에서 주로 겪는 일이지만 백팩을 짊어진 사람이 두 명만 마주 서 있으면 통로는 막히고 만다. 문제는 정작 백팩족 자신들이 타인의 이동을 방해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타인의 불편과 타인의 불쾌감을 의식하지 않는 그런 태도에서 우리 시대의 또 다른 개인주의적 병폐가 읽힌다. 고학력일수록 그런 개인주의는 더 심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러 사람이 사는 사회 속에 사는 만큼 나에게 내가 주인공인 것처럼 자기에게 자기의 주인공인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을 그들의 등에서 보게 된다. 현대적 의미에서 서사 혹은 이야기는 삶의 앞면에서 발생할 것 같지만 실은 삶의 뒷면, 삶의 배면에 축적되어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고 그 이야기는 그 사람의 전면보다 등에 새겨지게 된다.
백팩의 윤리학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개인주의를 측정하는 척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선이 자기에게로만 향해 있다는 것, 스마트폰에 정신이 팔린 채 타인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등을 책임지는 사회로 진입해야 한다. 개인의 등은 개인이, 사회의 등은 사회가, 국가의 등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바꿔 말하면 국민의 등을 관리하는 사회복지정책인 것과 같다. 회사도 사원들의 등을 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정착시켜야 한다. 등을 책임지는 사회, 그게 문화선진국 진입의 관건이다. 봄은 왔지만 햇볕의 간절도(懇切度)를 더 절감하는 그런 봄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