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MCA, 새로운 100년의 약속] (12) 영남지역 독립 선교운동 구심점 대구YMCA
입력 2014-03-27 02:36
서문시장 독립만세운동 주도… 혹독한 시련
한국YMCA운동 100년 역사 가운데 민족독립운동에서부터 사회선교, 주민자치운동 등에 이르기까지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Y운동의 가치를 실천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친 지역Y들이 있다. 대구·광주·평양 등 대표적인 지역Y의 어제와 오늘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100년의 역사를 내다봤다.
대구의 중심가인 중구 남성로를 따라 걷다 보면 오래된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이 눈에 띈다.
올해로 100년의 역사를 맞은 옛 대구YMCA(교남Y) 본부다. 한때 철거 위기에 몰렸지만 지난해 등록문화재 및 현충시설로 지정되면서 내년 이맘때면 대구 3·1만세운동 기념관 및 대구Y역사관의 이름으로 시민 곁에 다시 설 예정이다.
옛 대구Y회관은 일제 강점기였던 1914년 당시 민족 자본의 거점이었던 대구 약령시에 둥지를 틀었다. 건물 1층에는 대구·경북지역의 성서공회라 일컬어지는 경북서원이 들어서면서 문서선교운동의 축으로 자리 잡았다. 성경 공부와 성서 보급, 외국어 교육, 사회봉사가 활발하게 펼쳐지던 청년 활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대구기독교청년회(대구Y)는 대구Y 건물이 세워진 이듬해인 1915년 창립됐다. 미국 북장로교의 관할 선교구역이었던 대구에서 제일교회 남산교회 서문교회 등 주요 교회 청년들이 주축이 됐다. 이들과 더불어 주요 선교기관이었던 동산병원 계성학교 신명학교 등 미션스쿨 소속 교사와 학생들까지 더해지면서 대구Y는 명실상부하게 대구지역 청년연합 활동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다.
대구Y의 탄생은 브루엔(H M Bruen·1874∼1957) 선교사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교회의 실패는 YMCA운동의 기회’라고 주창하던 그는 교회에만 머물러선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청년 선교 활성화를 위해 대구Y 설립에 팔을 걷었다. 그와 함께 대구Y의 최초 한국인 지도자들인 이만집(1875∼1944) 목사와 김태련(1879∼1943) 조사(助事·지금의 전도사 비슷한 직분) 등도 대구Y가 뿌리 내리는 데 힘을 보탰다.
이 목사는 대구에 첫발을 내디딘 베어드(W M Baird)의 처남 안의와(J M Adams) 선교사를 만나면서 기독교를 처음 접했다. 42세에 목사 안수를 받은 뒤 대구 남산정교회를 담임하는 등 토착교회 목회자로, Y운동가로 활동했다. 이만집의 동역자로 꼽히는 김 조사는 국내외를 오가며 상업에 종사하고 전당포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 목사를 도와 교회 조사로 활동하면서 대구Y 초대 총무를 맡았다.
이들은 신사참배 창씨개명 황국신민서사 등 친일 행위를 일절 배격하면서 일제 치하 당시 신앙인으로서, 민족운동가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긍지를 잃지 않은 지도자들로 유명하다. 무엇보다 영남 유림세력의 거센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목숨 걸고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의 신앙 열정은 Y운동을 통해 민족독립운동으로 나아갔다. 조선 유림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세계 에큐메니컬운동의 흐름, 그리고 민족의 독립을 향한 열정은 향후 대구Y의 활동 방향을 형성하는 지표로 자리 잡았다.
대구 서문시장 만세운동이 대표적이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들불처럼 퍼져나갈 때 대구Y는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열렸던 영남지역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대가는 혹독했다. 각각 대구Y의 초대 회장과 총무였던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총무를 비롯해 김영서 백남채 정광순 권희윤 이재인 등 12명의 이사 가운데 7명이 주도자로 몰려 구속되면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 때문에 대구Y는 2년여 활동이 중단되기에 이른다.
특히 김태련 총무의 외아들 김용해는 고문 후유증으로 붙잡힌 지 20여일 만에 사망했다. 아버지가 구속된 상황에서 김용해의 장례식은 시민들과 함께 대구기독교청년회장으로 조촐히 치러졌다. 김 총무는 자식의 죽음을 감옥에서 전해 들었다. 그는 2년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뒤 복역 중에 노역으로 받은 돈으로 아들 무덤에 비를 세우고 이런 내용의 비문을 새겼다.
‘기미 3월에 의로운 피 흘러넘치네 아비의 고된 품삯으로 아침 해 바라보이는 곳에 이 비를 세운다.’
활동을 재개한 대구Y는 약령시를 중심으로 전도운동, 물산장려운동, 농촌·야학운동, 무료 생활법률 강좌 등 활발한 행보를 이어갔다. 대구 남성로의 옛 대구Y 건물은 100년을 이어온 지난 세월, 선교와 민족의 독립, 건강한 시민사회를 위해 피와 땀으로 헌신한 기독교 민족 지도자들의 숨결이 담긴 역사적 유산이다. 기념관과 역사관으로 남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구Y는 내년 창립 100주년을 맞는다. 새로운 각오로 제2의 출발을 각오하는 대구Y가 새겨야 할 교훈이 있다면 71년 전 광복을 앞두고 하늘나라로 떠난 김태련 초대 총무의 유언이 아닐까.
“일찍 일어나 맑은 물 동이 동이 여다가 무궁화 잘 키워라. 이 민족이 살 길은 예수뿐이다.”
김경민 사무총장(대구YM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