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병권] ‘황제 노역’ 유감
입력 2014-03-26 02:56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린 이유는 재판받는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것”
우리 사회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거대 담론이 한때 유행한 적이 있다. 같은 제목의 책도 엄청나게 팔렸다. 일부에서는 이 책의 저자를 폄훼하며 미국의 철학자 롤스(J Rawls)의 아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우리 법조계에서는 롤스가 더 대우 받는다. 불후의 명저 ‘정의론’이 철학 및 법대생들의 필독서였다는 영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롤스는 사회제도에 관한 최고의 덕을 공정(公正)이라고 주장하고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즉 모든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자유를 완벽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과 가장 빈곤한 사람들의 복지를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불공정한 법과 제도는 그것이 아무리 효율적이라 하더라도 없어져야 한다고 설파했다.
요약하자면 사법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공정이 생명이란 말이다.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쪽에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도 공정성을 상징한다. 칼은 권위를 나타낸다. 무게를 달아 절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공정이며, 이를 위해서는 강제력이 필수라는 점을 나타낸 것이리라.
대주그룹 전 회장이 벌금 254억원을 내지 않는 대신 하루 5억원씩 계산되는 이른바 ‘황제 노역’을 선택해 전국이 떠들썩하다. 더욱이 건강검진 등을 이유로 사흘간 노역도 하지 않아 벌써 15억원이나 탕감 받았다. 벌금 낼 돈마저 없는 서민들은 몸으로 때우려 해도 대개의 경우 일당 5만∼10만원에 그친다. 도대체 이런 현실을 두고 어찌 정의가 실현됐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수한 성적으로 법관에 임용된 해당 사건 재판장이 통상의 경우와 현저히 차이가 나는 일당 5억원짜리 노역장 유치 선고를 아무 생각 없이 했다고 믿기지는 않는다. 검찰도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검찰은 항소심에서 벌금 1016억원을 구형하면서도 선고유예를 요청했다. 말하자면 일정 기간만 지나면 벌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을 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일인가.
선고유예란 범정(犯情)이 경미한, 말하자면 고의성이 없는 범인에 대해 적용되는 관대한 판결이다. 문제의 그룹 회장은 전산회계를 조작해 법인세를 탈세한 것은 물론 회삿돈 100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런 피고인에게 검찰은 관대한 처벌을 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황제 노역 판결을 전적으로 법원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이유다.
사실 사법부의 공정한 판결을 기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는 기원전 445년경에 태어난 희랍의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도 진작 간파했다. 그는 희극 ‘벌’을 통해 당시 법정의 부조리를 실감나게 야유했다. 닭이 늦게 우는 바람에 일찍 잠에서 깨지 못한 재판 당사자가 닭을 향해 상대방의 뇌물을 먹었다고 푸념한다. 또 궤변 전문가인 소피스트의 제자가 돼 말솜씨를 배운 뒤 법정에서 채권자를 말로 제압하고 돈을 갚지 않는 장면도 있다.
그의 작품이 희랍시대의 법조 비리를 그대로 전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사법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어려운지는 가늠해 볼 수 있다. 우리 법체계는 갈수록 법관에게 재량권을 과도하게 주기 때문에 ‘법관우월국가’로 변한 지 오래다. 좌우 배석판사도 없는 단독판사의 경우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법의 무지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유명한 법언(法諺)이 있다. 반면 법을 지나치게 많이 알아 나쁜 데 사용하는 법조인을 지칭하는 말도 있다. 바로 법비(法匪)다. 무장공비를 이를 때 사용하는 바로 그 비(匪)자다. 다름 아닌 도둑이란 말이다. 헌법에 의해 고도의 신분 보장을 받는 법관이 법을 좀 안다고 이런 판결을 내린다면 그 나라 사법부는 이미 조종(弔鐘)이 울린 것과 마찬가지다.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린 까닭은 재판을 받는 당사자가 누구인지 보지 말라는 의미란 걸 법관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