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교회를 통하다 3] 루터의 종교개혁이 정신적 자산 동서독 나란히 ‘나치 청산’ 앞장
입력 2014-03-26 02:49
동독 교회의 힘은 ‘뿌리깊은 저항의 역사’
동독 교회는 부조리를 타파하고, 현실을 개혁하는 역사적 전통을 갖고 있었다. 가톨릭의 타락에 맞서 종교개혁운동을 벌여 신교가 탄생한 지역이 동독이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의 과오를 사과하고 청산하는 데에는 동서독 교회가 함께 앞장섰다. 현재 일본 일부 우익 세력이 과거사를 왜곡·부정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행보였다.
동독 교회의 현실 참여는 16세기 종교개혁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483년 동독 지역인 작센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난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이 면죄부를 파는 부조리에 반대해 종교개혁의 횃불을 든 인물이다. 루터가 1517년 그 유명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내건 곳도 동독 지역이었던 비텐베르크 대학교 부속 교회당 정문이었고, 1519년 가톨릭 성직자 요한 에크와 논쟁을 벌인 장소도 라이프치히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저항했을 뿐 아니라 그 죄악에 눈을 감았던 오욕의 역사를 참회하는 일에도 동독 교회가 먼저 나섰다. 실제 서독에서 동독으로 ‘요나의 길’을 갔던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는 히틀러 독재에 저항하다 사형당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삶을 강조하며 기독교인의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외치기도 했다. 독일 교회 전체는 1945년 교회가 나치에 협조했던 죄를 고백하고, 교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슈투트가르트 고백’을 발표했다. 이 같은 나치 단죄 의식은 지금까지도 전 독일 국민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동독 교회는 분단 이후에도 현실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롤란트 가이펠 목사는 동독 튀링겐주에 있는 도시 게라에서 문학·예술·환경 문제를 연구하는 청소년 모임을 통일을 위한 범도시적 모임으로 확장시켰다. 동독 교회는 1971년 아이제나흐 총회에서 “증언과 봉사 공동체로서의 동독 교회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일각에선 정권에 굴복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동독 교회는 ‘사회주의 안의 교회(Kirche im Sozialismus)’ 개념을 통해 교회의 존립을 보장받고, 주민들의 도피처이자 민주주의 교육의 장으로서 활용됐다. 또 주민들의 정당한 항의와 요구사항을 동독 정부에 전달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모규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