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교회를 통하다 3] 정권 압력 맞서 약자·반체제 인사 보호… 민주화 성지
입력 2014-03-26 03:54
(3) 동독 교회, 자유의 해방구로 민주화 견인
동독 교회는 분단시절 동독 주민들의 안식처였을 뿐 아니라 반체제 인사를 보호하는 민주화의 성지였다. 동독 정부 마지막 수장이었던 로타르 드 메지에르 전 총리는 훗날 “교회는 정치적 반대세력의 보호자인 동시에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의 변호사였으며 비폭력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동독의 혁명과 통일을 완결케 했다”고 평가했다. 동독보다 북한의 기독교 탄압이 더 심각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통일을 위해서는 한국에서도 교회가 적극적인 북한 선교 등 다양한 역할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독 교회는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줄곧 약자를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1988년 베르너 라이히 동독기독교연맹(BEK) 의장은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에게 “교회는 소수의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동독 내 비판적인 사회적 그룹들도 보살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동독 교회의 활약은 동독 체제의 모순이 표면화되고, 통일 열기가 무르익던 1980년대에 두드러졌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개인의 자유가 철저히 제한되고, 국가의 폭력이 정당화되는 현실을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 교회와 동베를린 겟세마네 교회였다.
특히 성니콜라이 교회는 통일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10월 현장을 방문했을 때 교회 복도에는 1980년대 후반 이곳에서 열렸던 평화의 기도회와 평화 시위에 대한 자료가 전시돼 있었다. 평화의 기도회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과 크리스티안 퓌러 목사 등이 당시 기도회 때 주민들에게 들려줬던 설교 자료 등이었다. 예배당에 들어서자 벽면에 평화의 기도회 당시 만들어진 포스터들이 배치돼 있었다. 성니콜라이 교회에선 1982년부터 매주 월요일 ‘칼을 쳐서 보습(쟁기)으로’라는 슬로건 하에 평화의 기도회를 열었다. 퓌러 목사와 크리스토프 보네베르거 목사가 주도한 평화의 기도회는 1989년 10월 9일 7만여명, 11월 6일 50여만명이 참여하는 평화 시위로 연결됐다. 성니콜라이 교회가 시작한 평화의 기도회는 동독 전역에서 여행의 자유, 표현의 자유, 경제제도 개혁 등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로 확산됐다. 그리고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퓌러 목사는 장벽이 무너졌을 때 구약성서 여호수아 6장을 인용하며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들이 7일간 여리고성을 돌며 크게 외치므로 그 장벽이 무너져 내린 것과 같이 우리가 7주 동안 월요일마다 모여 장벽을 돌며 크게 외치므로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고 말았다”고 벅찬 마음을 표현했다. 성니콜라이 교회는 지금도 여전히 정문에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안내판을 내걸고 매주 월요일 평화의 기도회를 열고 있다.
겟세마네 교회는 동독 정권의 심장이었던 수도 동베를린에서 ‘정치범을 위한 기도회’를 열며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자 반체제 인사들의 안식처 역할을 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2009년 11월 9일 장벽 붕괴 20주년을 기념한 자유의 축제 때 겟세마네 교회에서 열린 기념 예배에 참석해 분단의 비극과 통일의 중요성을 되새긴 바 있다.
동독 정권은 교회에 갖은 협박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심지어 비밀경찰인 슈타지까지 동원하며 감시와 사찰에 나섰지만 교회는 굴복하지 않았다. 보네베르거 목사는 “동독 정부가 아예 기도회를 못하도록 교회 지도부에 압력을 넣기도 했고, 나도 기도회에서 손을 떼라는 협박을 받았지만 자유와 영혼 구원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동독 교회가 비폭력을 끝까지 고수해 정권이 개입할 명분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동독 주민들의 교회에 대한 존경과 믿음 때문에 쉽사리 박해를 할 수도 없었다. 실제 1987년 동독은 지하 단체의 비밀 출판물을 찾기 위해 동베를린 시온 교회를 수색했지만 이에 부당함을 비판하는 집회가 동독 전역에서 발생했다.
사회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도 동독 교회는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시위가 격화되던 1989년 고트프리트 포르크 동베를린 주교 등 동독 교회 지도급 인사 19명은 동베를린 속죄교회에 모여 4개항의 긴급 요청을 성명으로 발표했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동독 정부가 명확하고 믿을 만한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또 경찰은 자제하고 일반 시민들은 질서 있는 시위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단 한 번의 유혈사태 없이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고, 통일이 이뤄졌다.
동독 인민의회 의장이자 슈타지 활동에도 깊숙이 간여했던 호르스트 진더만은 통일 후 “우리는 통일을 막을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 모든 정보를 막을 수 있었고, 사회 여러 단체의 활동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하나만 대책이 없었다. 바로 교회의 기도와 촛불이었다”고 고백했다.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