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강은교] 3월과 고독과 아버지

입력 2014-03-26 02:36


3월이 간다.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있는 그 집 문 앞에도 키 큰 목련이 눈부신 꽃잎을 하늘을 향하여 펼치고 있다. 그 꽃잎을 보느라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여고시절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한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무렵이면 늘 골목 끝에서 기다리시던 아버지. 아버지의 등 뒤에 펼쳐져 있던 하늘.

아버지는 그때, 어린 딸을 바라보시며 어떤 생각이 들곤 하셨을까. 그동안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진 않으셨을까. ‘그때 그렇게 하지 말 것을’ 하는, 후회로 가슴 아프고 계시진 않으셨을까. 어느 날 불현듯 유서를 써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계시진 않으셨을까. 열심히 걸어오신 삶이 후회스러우시면서 문득 억울하다고 생각하진 않으셨을까.

그동안 무엇인가 열심히 원고지를 긁적거리며, 무엇인가 늘 세상을 향하여 중얼거림과 외침을 던진 일이 참 쓸데없는 짓이었구나, 하고 생각하시다가 어느 날엔가는 문득 자살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시고 화들짝 놀라시진 않으셨을까. 아, 얼마나 고독하셨을까, 아버지는.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나도 뒤허리를 문지르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처럼./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나도 안경을 들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처럼.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나도 골목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럼.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나도 몇 개의 알약을 먹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처럼./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나도 한약 한 봉지를 고개를 치켜들고 마시면서, 아, 고독하구나,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가 그러셨을 것처럼.

그렇다. 아버지라는 공간은 수천 아버지가 들끓는 동심원 같은 공간이다. 그 동심원 속에, 마치 핵 같은 점으로 아버지는 들어 있다. 아버지의 뼛속에 불던 바람은 이제 나의 하늘에 불고 있다. 아버지의 눈썹 밑을 적시던 비는 이제 나의 하늘에 내리고 있다. 아버지의 어깨 위를 하염없이 비추던 황혼은 이제 나의 하늘에 내려앉아 있다.

시금치나물을 유난히 잘 잡수시던 아버지의 위장. 그 위장 속으로 깊이깊이 나는 내려간다. 그래서 하나가 된다. 나는 또 하나의 시간이 된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불멸이다. 어머니가 불멸이듯이, 모든 숨이 불멸이듯이. 현재가 영원이므로 불멸이듯이. 3월도 불멸이다. 4월과 5월에 등 떠밀리며 서 있는 3월의 눈부신 고독도 불멸이다. 모든 생명의 불멸의 고독이다.

강은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