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사건 증거위조 수사] 실무자-지휘부 연결고리 끊겨… ‘윗선’ 규명 속도 꺾이나
입력 2014-03-25 03:54
간첩사건 증거 위조 수사가 국가정보원 권모(52) 과장의 자살 기도라는 돌발변수를 만났다. 그는 이번 사건의 핵심 피의자로 수사를 받아왔다. 검찰은 권 과장 자살 기도로 그동안의 수사 방식을 재점검하기로 했다. 국정원 실무자와 지휘부의 연결고리가 끊겨 ‘윗선’을 향한 검찰 수사는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검찰은 권 과장을 김모 조정관(일명 ‘김 사장’·구속), 이인철 주선양 총영사관 영사와 함께 위조문서 입수 과정에 관여한 주요 인물로 지목해왔다. 권 과장은 국정원이 유우성(34)씨 내사에 착수할 때부터 투입돼 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중간에 팀을 옮겼지만 중국 현지 사정에 밝아 이후에도 문서 입수 방법을 기획하며 ‘유우성 수사팀’에 도움을 줬던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국정원 협조자 김모(61·구속)씨가 위조한 중국 싼허변방검사참 명의 정황설명서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영사확인을 받도록 한 것도 권 과장의 아이디어였던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국정원은 지난달 증거조작 의혹이 터지자 권 과장을 선양 영사관에 부총영사로 발령냈다고 한다. 선양 영사관에는 이미 국정원 직원인 이 영사가 파견된 상태였던 만큼 국정원이 중국 내 두터운 인맥을 지닌 권 과장에게 ‘해결사’ 역할을 주문했던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온다.
검찰은 권 과장 조사가 윗선 수사를 향한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세 차례나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하며 조사에 공을 들였다. 결국 권 과장의 자살 기도는 검찰 수사가 국정원 윗선으로 올라오는 것에 대한 위기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검찰이 국정원의 조직적 개입 여부를 강도 높게 추궁하자 ‘대공수사국 전체를 위조범으로 몰고 있다’는 반발감이 작용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권 과장의 자살 기도 소식을 들은 대공수사국 직원들은 크게 당혹해 하며 검찰을 성토했다고 한다.
검찰 수사로 신분이 노출되면서 좌절감이나 불안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권 과장은 지난 21일 검찰과 신경전을 벌이고 뛰쳐나온 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온갖 모욕을 다 받고 용도폐기됐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검찰 수사 방향에 대한 강한 불만을 담은 유서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수사팀을 이끌고 있는 윤갑근 대검 강력부장은 24일 “참담한 마음에 밤잠도 못 잤다”며 “수사 과정을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 점검하고 향후 치밀하고 적정한 수사 계획과 대책을 세우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다만 “수사는 수사 논리대로 갈 것”이라며 “수사 검사들이 (이번 일로) 실망하고 좌절해서 수사에 지장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검찰은 이르면 다음 달 초 수사를 마무리할 방침이다.
권 과장은 신분을 숨기고 활동하는 ‘블랙’ 요원으로 일하는 등 조직 내 대공수사 베테랑으로 꼽힌다. 1996년 아랍계 필리핀 간첩인 ‘무하마드 깐수’(한국명 정수일) 사건, 2006년 일심회 사건, 2011년 왕재산 사건 등 굵직한 간첩 사건 수사에 참여했고 공로를 인정받아 96년 보국훈장도 받았다고 한다.
전웅빈 기자 imung@kmib.co.kr